발전국가론의 등장과 이론적 배경
발전국가론(developmental state theory)은 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이론적 패러다임이다. 특히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신흥공업국가들의 성공적 산업화 경험은 기존의 주류 발전이론들(근대화론, 종속이론)이 예측하지 못한 현상이었으며, 이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틀로서 발전국가론이 부상했다.
발전국가론의 이론적 배경은 크게 세 가지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제도주의의 영향이다. 이 관점은 특정 시기에 형성된 제도적 배열이 이후의 발전 경로에 지속적 영향을 미친다는 '경로의존성'을 강조하며, 동아시아 국가들의 특수한 제도적 유산과 그 역사적 형성 과정에 주목한다. 둘째, 국가중심적 접근의 부활이다. 1970-80년대 사회과학에서는 국가의 자율성과 능력에 대한 관심이 renewed되었으며, 이는 '국가를 사회로 다시 가져오기(bringing the state back in)'라는 이론적 운동으로 나타났다. 셋째, 신제도주의 경제학의 발전이다. 이 관점은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고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데 있어 제도적 요인과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며,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이해하는 새로운 이론적 렌즈를 제공했다.
발전국가론의 선구적 연구로는 챨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의 일본 연구, 앨리스 앰스든(Alice Amsden)의 한국 연구, 그리고 로버트 웨이드(Robert Wade)의 대만 연구가 있다. 특히 존슨이 제시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개념은 경제발전을 최우선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국가 유형을 가리키며,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적 특성을 포착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
피터 에반스(Peter Evans)는 『착근된 자율성(Embedded Autonomy)』에서 발전국가의 이론적 모델을 더욱 정교화했다. 그에 따르면 성공적 발전국가의 핵심 특성은 '착근된 자율성(embedded autonomy)'이다. 이는 국가가 사회 세력(특히 자본가 집단)으로부터 충분한 자율성을 가져 독자적 발전 목표를 추구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정보를 획득하고 정책을 효과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에반스는 이러한 착근된 자율성이 한국, 일본, 대만과 같은 발전국가의 성공을 가능케 한 제도적 기반이었으며, 이는 정치 엘리트의 응집력, 능력주의적 관료제, 국가-기업 간 제도화된 협력 채널 등을 통해 구현되었다고 분석한다.
발전국가론은 1990년대 이후 비판과 수정의 과정을 거치며 발전해왔다. 특히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발전국가 모델의 한계와 변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최근의 발전국가론은 세계화, 민주화, 정보화 등 변화된 맥락 속에서 발전국가의 지속과 변형, 그리고 새로운 발전 모델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발전국가의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환경적 비용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강화되고 있다.
한국 발전국가의 형성과 구조적 특징
한국 발전국가의 형성은 196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국가-사회 관계의 근본적 재편과 새로운 발전 모델의 등장을 의미했다. 한국 발전국가 형성의 역사적 맥락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지정학적 맥락이다. 냉전체제와 한반도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한국의 안보 위기와 경제적 생존의 절박성을 높였으며, 이는 발전국가 형성의 중요한 외부적 조건이 되었다. 특히 미국의 안보 이익과 한국의 발전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은 한국 발전국가의 초기 자원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둘째, 국내 정치적 맥락이다. 1961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 성장을 통해 보완하고자 했으며, 이는 국가의 전략적 발전 개입에 정치적 동기를 제공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경험은 한국 사회의 자율적 세력(시민사회, 노동계급, 지역 엘리트 등)을 약화시켰으며, 이는 국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성을 갖고 발전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셋째, 역사적-제도적 유산이다.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강력한 국가 관료제와 식민지 산업화의 경험, 그리고 1950년대의 수입대체산업화 시도 등은 발전국가 형성의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특히 일본 발전 모델에 대한 학습과 모방은 한국 발전국가의 정책 방향과 제도적 설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형성된 한국 발전국가의 구조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강력한 국가 자율성이다. 한국의 발전국가는 자본가 집단이나 노동계급 등 사회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며, 이는 국가가 장기적 발전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 하에서 권위주의적 통치 구조와 선별적 탄압은 국가의 자율적 정책 공간을 확보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
둘째, 고도로 집중된 경제 계획 및 조정 기구의 존재다. 경제기획원(EPB)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기구들은 경제 자원의 동원과 배분, 산업 정책의 수립과 실행, 국가-기업 관계의 조정 등 발전국가의 핵심 기능을 담당했다. 특히 '경제 참모본부'로서의 경제기획원은 부처 간 조정 능력과 정책 일관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했다.
셋째, 능력주의적 관료제의 발달이다. 한국의 발전국가는 고도로 훈련된 엘리트 관료집단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이들의 전문성과 응집력은 정책 효과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특히 고시 제도를 통한 선발, 성과에 기반한、승진, 부처 간 순환 근무 등은 관료제의 능력과 응집성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로 작용했다.
넷째, 국가-기업 간의 긴밀한 연계와 협력이다. 한국의 발전국가는 선별적 산업 정책과 인센티브 체계를 통해 민간 기업(특히 재벌)의 투자와 혁신을 유도했으며, 이는 '성과 연계적 지원(performance-linked support)'이라는 특징적 메커니즘으로 나타났다. 국가는 금융 통제, 라이센스 발급, 외환 할당 등 다양한 정책 도구를 활용해 기업 행동을 유도했으며, 이는 시장 신호만으로는 충분히 생성되지 않는 장기적 투자와 산업 고도화를 가능케 했다.
다섯째, 사회 통제와 동원의 메커니즘이다. 한국의 발전국가는 노동 억압과 사회 안정을 통해 낮은 임금과 높은 저축률을 유지했으며, 이는 자본 축적과 수출 경쟁력 확보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또한 국가는 교육 제도, 대중 매체,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대중의 동원과 협력을 유도했다.
이러한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한국의 발전국가는 1960-70년대에 걸쳐 급속한 경제성장과 산업 구조의 고도화를 이끌어냈다. 특히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 중화학공업화, 그리고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 형성은 한국 발전국가의 대표적 성과이자, 오늘날 한국 경제의 구조적 특성을 규정하는 역사적 유산이 되었다.
1960-8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전개와 성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 발전국가의 핵심적 정책 수단으로, 1962년부터 1996년까지 총 7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특히 1960-80년대에 실시된 1-5차 계획은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구조 변화를 이끈 중요한 정책 틀이었다. 각 계획의 주요 내용과 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은 '자립 경제 기반 구축'을 목표로, 에너지 및 기간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 확충, 수출 증대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시기에는 전력, 정유, 비료 등 기초 산업과 도로, 항만 등 인프라 건설이 중점적으로 추진되었다. 계획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3%로, 당초 목표였던 7.1%를 상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수출은 1962년 5,500만 달러에서 1966년 2억 5,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은 '수출주도 공업화'와 '자립 경제 확립'을 목표로, 철강, 기계, 화학 등 기간산업 육성과 수출 산업 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는 포항제철소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대규모 산업 인프라 프로젝트가 추진되었으며, 수출 촉진을 위한 다양한 정책 수단(수출금융, 세제 혜택, 행정 지원 등)이 도입되었다. 계획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7%였으며, 수출은 1971년에는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은 '중화학공업화'와 '농어촌 경제 현대화'를 목표로, 철강, 조선, 전자, 석유화학, 기계, 비철금속 등 6대 전략 산업의 육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시기에는 중화학공업 투자의 급격한 확대와 함께,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촌 근대화가 병행 추진되었다. 계획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6%였으며, 수출은 1976년에 80억 달러를 돌파했다. 특히 산업 구조면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며, 경제의 구조적 고도화가 진전되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은 '자력 성장 구조 확립'과 '사회 개발의 균형적 발전'을 목표로, 산업 구조의 고도화, 기술 혁신, 그리고 수출 시장 다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두 차례의 석유 위기와 중화학공업 투자의 과잉, 정치적 불안정(박정희 대통령 암살)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계획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8%로, 이전 계획들에 비해 둔화되었으나, 수출은 1981년에 200억 달러를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은 '안정, 능률, 균형'을 기조로, 경제 안정화와 함께 산업 구조 조정, 기술 혁신, 그리고 개방화 대응에 역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는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금융 자유화 시작, 수입 자유화 확대 등 경제 운용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작되었다. 계획 기간 중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7%로 회복되었으며, 무역수지는 1986년에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이러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전개 과정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인다. 첫째, 계획의 연속성과 적응성이다. 각 계획은 이전 계획의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목표와 전략을 조정해 나갔으며, 이는 장기적 일관성과 상황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가능케 했다. 둘째, 국제 환경 변화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다. 각 계획은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기회를 포착하여 한국의 비교우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셋째, 국가 주도성과 시장 메커니즘의 결합이다. 계획은 기본적으로 국가 주도의 발전 전략을 반영했지만, 동시에 시장 신호와 기업가적 반응을 활용하는 혼합 전략의 성격을 가졌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는 인상적이었다. 1962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 경제는 연평균 8.5%의 고도성장을 달성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1962년)에서 2,300달러(1986년)로 26배 이상 증가했다. 수출은 같은 기간 5,500만 달러에서 340억 달러로 618배 증가했으며, 산업 구조는 농업 중심에서 제조업 중심으로 급격히 변화했다. 이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성공적 산업화의 대표적 사례로, 오늘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의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경제개발 계획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와 부작용을 남겼다. 소득 불평등의 심화, 지역 간 불균형 발전, 환경 파괴, 노동권 억압, 그리고 재벌 중심의 경제 집중 등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구조적 문제로 지속되었다. 또한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새로운 환경 변화는 발전국가 모델과 경제개발 계획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국가주도 산업화와 산업구조의 변동
한국의 국가주도 산업화는 단기간에 경제 구조와 산업 역량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과정은 정교한 산업 정책과 전략적 부문 선택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한국은 농업 중심의 저개발 경제에서 제조업 강국으로 급속히 변모했다. 이러한 산업구조 변동의 주요 특징과 메커니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의 산업화는 단계적 고도화 전략을 따랐다. 1960년대에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섬유, 신발, 가발 등)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당시 한국의 비교우위(저임금 노동력)를 활용한 전략이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철강, 조선, 석유화학, 자동차, 기계, 전자 등)으로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기술집약적 산업(반도체, 컴퓨터, 통신기기 등)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단계적 고도화는 산업 간 연관효과와 학습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비교우위를 창출해 나가는 전략적 접근이었다.
둘째, 선별적 산업 정책과 집중적 자원 배분이 중요한 정책 수단이었다. 한국 정부는 특정 '전략 산업'을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했으며, 이는 제한된 자원의 효율적 활용과 규모의 경제 달성을 위한 전략이었다. 특히 1973년 발표된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철강, 조선, 전자, 기계, 비철금속, 석유화학 등 6대 전략 산업에 대한 집중 투자를 통해 산업 구조의 급격한 고도화를 이끌었다.
셋째,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이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한국은 초기 산업화 단계부터 내수시장이 아닌 세계시장을 목표로 하는 수출 지향적 전략을 채택했으며, 이는 '수출 제일주의'라는 국가적 슬로건에서도 드러난다. 수출 기업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금융 지원, 세제 혜택, 행정 지원 등)와 성과에 기반한 보상 체계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수출 참여와 국제 경쟁력 향상을 유도했다.
넷째, 기술 획득과 산업 역량 구축이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다. 한국은 초기에는 해외 기술의 도입과 모방에 중점을 두었으나, 점차 자체 연구개발 능력 강화로 전환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는 과학기술 인프라 구축, 기업 R&D 지원, 산학연 협력 촉진 등을 통해 기술 혁신 역량을 강화했으며, 이는 지식집약적 산업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섯째, 재벌 중심의 산업 조직이 형성되었다. 한국 정부는 대규모 자본 동원과 위험 부담이 필요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미 경공업에서 성공을 거둔 몇몇 기업집단에 집중적인 지원과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재벌이라는 독특한 기업 조직의 성장과 확장을 촉진했으며, 오늘날까지 한국 경제의 중요한 구조적 특성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국가주도 산업화의 결과, 한국의 산업구조는 급격히 변화했다.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농림어업은 1960년 36.8%에서 1990년 8.7%로 크게 감소한 반면, 제조업은 같은 기간 13.6%에서 28.9%로 증가했다. 고용 구조 역시 농림어업 중심에서 제조업과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화했다. 수출 구조를 보면, 1960년대 초반에는 1차 산품이 주를 이루었으나, 1990년에는 제조업 제품이 전체 수출의 95%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수출 품목의 기술 수준도 급격히 향상되어,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반도체, 컴퓨터, 자동차 등 기술집약적 제품이 주요 수출 품목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산업구조 변동은 한국 경제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변화시켰다. 1960년대 초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였던 한국은 1990년대 중반에는 세계 12위권의 무역 대국이자 신흥 산업 강국으로 부상했다. 특히 몇몇 산업 분야(조선, 철강,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에서는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며 글로벌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가주도 산업화는 몇 가지 중요한 구조적 문제를 남겼다. 첫째, 산업 간, 기업 규모 간 불균형 발전이다. 중화학공업과 수출 산업 중심의 발전 전략은 농업과 서비스업의 상대적 저발전,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 확대를 초래했다. 둘째, 재벌 중심의 경제 집중이다. 재벌의 급속한 성장과 확장은 경제력 집중, 시장 지배력 남용, 그리고 정경유착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셋째, 기술 의존성이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해외 기술과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으며, 이는 자체 혁신 역량 발전의 제약 요인이 되었다. 넷째, 환경 및 노동 문제다. 고속 성장 중심의 산업화는 환경 파괴와 노동권 억압을 수반했으며, 이는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가주도 산업화와 그로 인한 산업구조 변동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성공적 '후발 산업화'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특히 국가의 전략적 개입과 시장 메커니즘의 창조적 결합, 그리고 글로벌 경제 환경의 전략적 활용은 다른 발전도상국들에게 중요한 정책적 교훈을 제공한다. 더불어 한국의 산업화 경험은 발전국가론, 후발산업화론 등 발전 이론의 발전에도 중요한 경험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발전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개발독재와 권위주의 체제의 정치경제학
한국의 산업화 과정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체제, 일명 '개발독재'의 틀 안에서 진행되었다. 개발독재는 경제 발전을 최우선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정치적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희생시키는 권위주의적 통치 형태를 가리킨다. 특히 박정희 정권(1961-1979)은 이러한 개발독재의 전형적 사례로, 강력한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과 권위주의적 정치 통제를 결합했다.
개발독재의 정치경제학적 메커니즘은 크게 네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정치적 안정과 경제 성장의 교환 관계다. 개발독재는 정치적 자유의 제한과 권위주의적 통제를 통해 사회적 안정과 노동 통제를 확보하고, 그 대가로 경제 성장과 물질적 생활 향상을 제공하는 일종의 암묵적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했다. 이를 통해 장기적 투자 환경의 안정성과 저임금-고투자 체제의 유지가 가능했다.
둘째, 국가 자율성의 확보 메커니즘이다. 개발독재는 군부, 관료제, 경찰, 정보기관 등 국가 조직의 강화와 사회 세력(노동, 농민, 시민사회 등)의 약화 또는 통제를 통해 국가의 높은 자율성을 확보했다. 이는 국가가 특정 계급이나 이익집단의 단기적 이해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장기적 발전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셋째, 정당성 확보 메커니즘이다. 개발독재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정당성의 결핍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이를 경제적 성과와 안보적 위기 담론을 통해 보완하고자 했다. '선성장 후분배', '선건설 후통일' 등의 구호는 현재의 희생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였으며,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탱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자원이었다.
넷째, 국가-자본 관계의 재구성이다. 개발독재는 국가가 금융 통제, 라이센스 발급, 외환 할당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통해 자본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국가-자본 관계를 재구성했다. 이는 시장 원리만으로는 충분히 발생하지 않는 장기적 산업 투자와 위험 감수를 유도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개발독재 체제는 1960-70년대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여러 긴장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개발독재의 정치경제학적 모순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장기 집권에 따른 권위주의 체제의 경직화와 부패,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증가가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 투자 과잉, 재벌의 과도한 확장, 석유 위기 등으로 인한 구조적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노동 억압, 빈부 격차, 지역 불균형 등 '성장의 그림자'가 사회적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다층적 모순과 위기는 결국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함께 개발독재 체제의 근본적 재편을 가져왔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개발독재의 틀을 유지했지만, 경제 운용 패러다임에서는 상당한 변화(안정화, 자유화, 개방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개발독재의 정치적 유산인 권위주의 체제는 1987년 민주화 항쟁을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 도입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관계와 동학
1960-80년대 한국 발전국가 시기의 국가-시장-시민사회 관계는 국가 우위의 비대칭적 구조가 특징이었다. 강력한 국가, 종속적 시장, 약한 시민사회라는 이 구도는 한국의 압축적 산업화를 가능케 한 제도적 기반이었지만, 동시에 다양한 긴장과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국가와 시장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주도성과 시장의 종속성이 특징이었다. 국가는 경제 계획 수립, 자원 배분, 산업 정책 실행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금융 통제, 각종 규제와 인센티브를 통해 시장 행위자들의 행동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시장 억압이나 대체가 아닌, 시장 메커니즘의 전략적 활용과 조절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특히 수출 성과에 기반한 지원 체계는 시장 경쟁과 국가 개입의 창의적 결합으로, 단순한 명령경제나 자유시장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관계였다.
국가와 기업의 관계는 '지배와 육성'의 이중성을 띠었다. 국가는 기업(특히 재벌)에 대해 강력한 규율 권한을 행사했지만, 동시에 이들의 성장과 확장을 적극 지원했다. 김호기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는 '포섭적 지배(inclusive domination)'의 성격을 가졌으며, 이는 단순한 통제나 자율의 차원을 넘어선 복합적 관계였다. 특히 국가와 재벌 간의 이러한 관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했는데, 초기에는 국가의 우위가 분명했으나 재벌의 성장과 함께 점차 상호의존적 관계로 진화했다.
국가와 노동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억압과 배제의 성격이 강했다. 국가는 노동기본권 제한, 노조 활동 통제, 저임금 정책 등을 통해 노동계급을 산업화의 비용 부담자로 위치시켰다. 특히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산업 노동계급에 대한 통제는 경제적 목적(낮은 임금을 통한 수출 경쟁력 유지)뿐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잠재적 저항 세력의 억제)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노동 통제 체제에 대한 저항이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 노동운동으로 분출되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역시 기본적으로 통제와 동원의 성격이 강했다. 국가는 다양한 통제 장치(언론 검열, 집회 제한, 정보기관의 감시 등)를 통해 시민사회의 자율적 공간을 제한했으며, 동시에 새마을운동, 민방위, 직장 새마을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대중 동원을 통해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다. 그러나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중산층의 성장, 교육 수준의 향상, 도시화 등이 이루어지면서 시민사회의 자율적 공간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국가-시장-시민사회 관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세 영역 간의 세력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 항쟁을 통해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으며, 이는 국가 권력에 대한 시민사회의 견제 능력을 크게 강화했다. 경제적으로는 재벌의 성장과 자본 자유화의 진전으로 시장 영역의 자율성이 크게 증가했으며, 이는 국가의 경제 통제 능력을 약화시켰다. a사회적으로는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성장으로 시민사회의 조직적 역량과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으며, 이는 발전국가 시기의 국가 중심적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정태석의 연구는 이러한 변화를 '발전국가에서 민주적 시장사회로의 이행'으로 개념화한다. 그에 따르면,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국가 주도의 발전 모델에서 시장과 시민사회의 역할이 강화된 보다 다원적인 사회 모델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단절적이기보다는 점진적이고 불완전한 성격을 가졌으며, 발전국가의 제도적·문화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사회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발전국가 모델의 위기와 변화: 1980년대 이후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은 대내외적 환경 변화와 내적 모순의 심화로 인해 근본적인 위기와 변화를 경험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정책 방향의 조정이 아닌, 발전국가의 제도적 기반과 작동 메커니즘의 근본적 재편을 의미했다.
발전국가 모델의 위기와 변화를 초래한 요인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대외적 환경의 변화다. 1980년대 이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확산, 무역 및 금융 자유화에 대한 국제적 압력, 그리고 기술 혁신과 생산 체계의 변화는 국가 중심의 폐쇄적 발전 모델의 유효성을 크게 약화시켰다. 특히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발전국가 모델의 취약성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둘째, 정치적 민주화의 영향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진행된 정치적 자유화와 시민사회의 성장은 국가의 일방적 정책 결정과 사회 통제 능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노동운동의 성장과 시민단체의 활성화는 발전국가의 핵심 작동 조건이었던 '사회적 규율'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더불어 선거 경쟁의 심화와 민주적 책임성의 강화는 정책 결정의 단기적 지향과 포퓰리즘적 경향을 증가시켰다.
셋째, 발전국가 모델 자체의 내적 모순과 한계다. 재벌 중심의 경제 집중, 관치금융의 비효율성, 정경유착과 부패, 그리고 규제의 경직성 등 발전국가 모델의 구조적 문제들이 1980년대 이후 점차 표면화되었다. 특히 재벌의 성장에 따른 경제력 집중은 국가의 경제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시장 왜곡과 불평등 심화라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초래했다.
이러한 변화 압력 속에서,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은 1980년대 이후 지속적인 재편 과정을 경험했다. 이 과정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1980년대의 '조정기'다. 전두환 정부는 외형적으로는 발전국가의 틀을 유지했지만, 안정화, 자유화, 민간 주도성 강화 등의 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했다. 특히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금융 자유화의 시작, 수입 자유화 확대 등은 이전의 '성장 우선' 정책에서 '안정 중시' 정책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둘째, 1990년대의 '변형기'다. 특히 김영삼 정부(1993-1998)는 '세계화'와 '신경제'를 표방하며 시장 자유화, 규제 완화, 금융 개방 등을 적극 추진했으며, 1996년 OECD 가입은 이러한 정책 방향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자유화는 발전국가의 통제 능력은 약화시키면서도 그 보완적 조정 메커니즘은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불완전한 자유화'의 성격이 강했으며, 이는 1997년 외환위기의 중요한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
셋째,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의 '근본적 재편기'다. 김대중 정부는 IMF 프로그램에 따라 광범위한 구조 개혁(금융, 기업, 노동, 공공 부문)을 추진했으며, 이는 발전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금융 부문의 전면적 개방과 재벌 개혁, 그리고 노동 시장 유연화 등은 국가-시장-사회 관계의 근본적 재편을 의미했다. 이러한 변화는 일종의 '발전국가에서 규제국가로의 전환'으로 개념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발전국가의 제도적·문화적 유산은 오늘날 한국 정치경제의 여러 측면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산업 정책과 경제 개입에 대한 국가의 지향성, 관료제의 중요한 역할, 그리고 발전주의적 가치관은 변화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이는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적 규제국가로의 전환이 단절적이기보다는 '경로의존적 변화'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발전국가 모델의 위기와 변화는 한국 정치경제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정책적 질문들을 제기한다. 발전국가의 긍정적 측면(장기적 발전 비전, 전략적 조정 능력 등)을 유지하면서도 그 부정적 측면(권위주의적 통제, 포획과 부패 위험 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발전 모델은 무엇인가?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국가-시장-시민사회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한국의 발전국가 경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중요한 이론적 과제로 남아있다.
발전국가 프레임을 통해 1960~80년대 국가–시장–시민사회 관계를 분석하는 이론적 작업은, 한국 근대화의 독특한 경로와 그 제도적 기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구조적 문제(불평등, a노동 불안정성, 정경유착, 관료주의 등)의 역사적 기원을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더불어 이러한 이론적 성찰은 한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발전 이론의 지평을 확장하고, 다른 발전도상국들에게 유용한 정책적 교훈을 제공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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