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Science

정치제도론 13. 비공식 제도와 규범 - 보이지 않는 규칙의 힘

SSSCHS 2025. 5. 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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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에서 제도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비공식 제도에 대한 인식이다. 헌법이나 법률, 공식 규정만으로는 정치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비공식 제도 연구는, 정치 행위자들이 실제로 따르는 '보이지 않는 규칙'에 주목한다. 그레첸 헬름케(Gretchen Helmke)와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의 선구적 연구는 비공식 제도가 공식 제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비공식 제도의 개념과 유형

비공식 제도는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규칙으로, 주로 공식적 채널 밖에서 만들어지고, 소통되며, 집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문화나 관행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비공식 제도는 행위자들의 기대를 형성하고, 일탈에 대한 제재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적 성격을 띤다.

헬름케와 레비츠키는 비공식 제도를 공식 제도와의 관계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한다:

1. 보완적(Complementary) 비공식 제도
공식 제도의 효과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일본의 '네마와시'(根回し) 관행이 대표적이다. 공식 회의 전에 관련자들과 사전 조율을 거치는 이 관행은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갈등을 최소화한다. 한국의 '사전 당정협의'도 비슷한 기능을 한다.

2. 대체적(Substitutive) 비공식 제도
공식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 기능을 대신한다. 중국의 '꽌시'(關係) 네트워크가 좋은 예다. 법치가 취약한 환경에서 개인적 관계망이 계약 이행과 분쟁 해결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3. 수용적(Accommodating) 비공식 제도
공식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행위자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미국 상원의 '필리버스터'가 초기에는 이런 성격이었다. 공식 규정에는 없지만, 무제한 토론을 통해 소수파가 입법을 저지할 수 있었다.

4. 경쟁적(Competing) 비공식 제도
공식 제도의 취지와 상충하는 비공식 규칙이다. 라틴아메리카의 '클리엔텔리즘'(clientelism)이 전형적이다. 민주적 선거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견-피후견 관계에 기반한 투표 행태가 지속된다.

비공식 제도의 작동 메커니즘

비공식 제도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비용-편익 계산이다. 공식 절차를 따르는 것보다 비공식 규칙을 따르는 것이 더 효율적일 때 비공식 제도가 발달한다. 둘째, 사회적 압력과 평판 메커니즘이다. 비공식 규범을 어기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거나 신뢰를 잃게 된다. 셋째, 경로의존성이다. 오랜 기간 형성된 비공식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국 정치의 비공식 제도들

한국 정치에서 관찰되는 주요 비공식 제도들은 다음과 같다:

'모피아'와 관료 네트워크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출신 관료들의 비공식 네트워크인 '모피아'는 한국 경제정책 결정의 핵심 행위자로 작동해왔다. 공식적인 직위를 떠난 후에도 선후배 관계를 통해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는 경제 정책의 일관성 유지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폐쇄적 의사결정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지역주의 투표 행태
헌법상 지역 차별은 금지되어 있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지역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 갈등 구조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정당 체제와 맞물려 고착화되었다. 최근 세대 교체와 함께 약화되는 추세지만, 여전히 중요한 정치적 균열로 작용한다.

'정치적 중립' 신화
공무원과 군인의 정치적 중립은 법적 의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권 교체에 따른 인사 변동, 정책 방향의 급격한 전환 등이 일상화되어 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공식 규범과 '정권 충성'이라는 비공식 규범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재벌 중심 경제 거버넌스
법적으로는 모든 기업이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몇몇 대기업 집단이 경제정책 결정에 특권적 접근권을 가진다. 청와대와 재벌 총수의 비공식 만남, 전경련 같은 경제단체의 로비 활동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동아시아의 비공식 제도 비교

일본: 파벌 정치와 '아마쿠다리'
자민당 내 파벌(하바츠)은 공식 조직이 아니지만, 총재 선출과 내각 구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아마쿠다리'(天下り)는 퇴직 관료가 관련 기업이나 단체로 재취업하는 관행으로, 정관계 유착의 통로가 된다.

중국: 파벌과 후견 네트워크
중국 공산당 내에는 '상하이방', '공청단파', '태자당' 등 비공식 파벌이 존재한다. 이들은 인사와 정책 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이러한 비공식 네트워크를 약화시키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대만: '흑금정치'의 유산
민주화 이전 국민당 독재 시기에 형성된 정치와 조직범죄의 유착 관계를 '흑금정치'라 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비공식 네트워크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지방 선거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비공식 제도의 이중성: 기능과 역기능

비공식 제도는 양면성을 가진다. 긍정적 측면에서는 공식 제도의 경직성을 보완하고, 거래비용을 절감하며,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만만치 않다. 투명성과 책임성을 저해하고, 부패의 온상이 되며,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긍정적 기능

  • 유연성 제공: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신속한 대응 가능
  • 갈등 완화: 비공식 협상을 통한 타협점 모색
  • 정보 비대칭 해소: 비공식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공유
  • 신뢰 구축: 반복적 상호작용을 통한 협력 관계 형성

부정적 기능

  • 불투명성: 의사결정 과정의 불투명화
  • 배제와 차별: 네트워크 외부자에 대한 차별
  • 부패 유발: 연고주의, 정실주의의 만연
  • 개혁 저항: 기득권 보호를 위한 변화 거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비공식 제도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형태의 비공식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온라인 여론 형성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형성되는 여론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댓글 여론', '해시태그 운동' 등은 공식적인 정치 참여 경로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디지털 네트워크 정치
카카오톡 단체방, 텔레그램 채널 등을 통한 정보 공유와 의견 조율이 일상화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대면 네트워크를 대체하거나 보완하는 새로운 비공식 제도로 자리잡고 있다.

알고리즘 거버넌스
플랫폼 기업의 알고리즘이 정보 유통과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이는 공식적인 규제 대상이 아니면서도 정치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형태의 비공식 제도다.

비공식 제도 연구의 방법론적 도전

비공식 제도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첫째, 관찰의 어려움이다. 비공식 제도는 문서화되지 않고,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둘째, 측정의 문제다. 비공식 규범의 강도나 영향력을 계량화하기 어렵다. 셋째, 인과관계 규명의 난점이다. 비공식 제도가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아니면 특정 결과가 비공식 제도를 강화하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이 시도되고 있다:

  • 참여관찰과 심층면접을 통한 질적 연구
  • 설문조사를 통한 규범 인식 측정
  • 실험 연구를 통한 인과관계 검증
  • 역사적 제도주의 접근을 통한 장기적 변화 추적

비공식 제도의 변화와 지속

비공식 제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스캇(W. Richard Scott)은 제도 변화의 세 가지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1. 규제적 변화
법률이나 규정의 변화가 비공식 제도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김영란법 시행이 접대 문화를 변화시킨 것이 좋은 예다.

2. 규범적 변화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가 비공식 제도를 변화시킨다. 성평등 의식의 확산이 직장 내 회식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다.

3. 문화-인지적 변화
새로운 세대의 등장, 교육 수준의 향상 등이 기존 비공식 제도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MZ세대의 등장으로 위계적 조직문화가 도전받고 있다.

정책적 함의: 비공식 제도 관리하기

정책 입안자들은 비공식 제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첫째, 비공식 제도의 존재와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긍정적 비공식 제도는 강화하고, 부정적 비공식 제도는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셋째, 공식 제도 설계 시 비공식 제도와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성공적인 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 비공식 제도에 대한 면밀한 사전 조사
  •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
  • 이해관계자들과의 충분한 소통
  • 대안적 인센티브 구조 마련
  •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피드백

비공식 제도는 정치 체제의 '숨겨진 배선'과 같다. 겉으로 보이는 공식 제도만큼이나, 때로는 그보다 더 강력하게 정치적 결과를 좌우한다. 제도 연구자들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규칙들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정책 실무자들은 이를 현명하게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한국과 같이 압축적 근대화를 경험한 사회에서는 전통적 비공식 제도와 현대적 공식 제도 사이의 긴장과 조화가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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