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logy

경제사회학 15. 미래 경제의 새로운 의제: 탈성장·기후경제·AI 경제가 그려내는 변화의 지평

SSSCHS 2025. 5. 27.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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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200년 넘게 지속되어온 산업자본주의의 기본 전제들이 도전받고 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라는 성장 지상주의는 지구 환경의 한계에 부딪혔고,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간 노동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홍수가 일상이 되었고, ChatGPT 같은 AI가 변호사와 의사의 일까지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기술적 혁신이나 환경 문제의 차원을 넘어선다. 경제 시스템 자체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 흔들리고, 인간의 노동이 기계로 대체될 때 우리 사회는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탈성장, 기후경제, AI 경제라는 세 가지 키워드는 미래 경제사회학의 핵심 의제다. 이들은 서로 분리된 개별 주제가 아니라 상호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변화 과정이다. 탈성장은 기후위기에 대한 응답이면서 동시에 AI로 인한 생산성 혁명의 결과이기도 하다.

탈성장 담론의 등장과 의미

탈성장(degrowth)이라는 개념은 1970년대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츠(André Gorz)가 처음 제시했지만, 본격적인 학술적 논의는 20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장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경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웰빙과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다.

탈성장론자들은 현재의 경제성장 모델이 지구의 물리적 한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매년 3% 성장을 한다면 경제 규모는 23년마다 두 배가 된다. 하지만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고, 환경의 수용 능력도 한계가 있다. 결국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경제는 지구라는 유한한 행성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탈성장론의 핵심이다.

하지만 탈성장이 곧 경기침체나 불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 소비는 줄이되 삶의 질은 높이는 방향으로 경제를 재편하자는 것이다. 근로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늘리며, 공유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 기반의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것 등이 탈성장의 구체적인 방향이다.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탈성장 정책이 실험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도넛 경제학' 모델을 도입해 경제성장보다는 시민의 기본 욕구 충족과 환경 한계 준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도 '근린경제'를 강화해 지역 내 자원 순환을 늘리고 있다.

한국에서도 탈성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YOLO(You Only Live Once)' 문화, 워라밸(Work-Life Balance) 추구, 미니멀 라이프 등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성장 중심 가치관에 대한 조용한 반란이라고 볼 수 있다.

기후경제의 부상과 녹색전환

기후변화는 더 이상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2023년 여름 한국의 폭염, 유럽의 산불, 북미의 극한 한파 등은 모두 기후변화의 직접적 결과다. 이런 기후위기는 경제 시스템 전반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후경제(climate economy)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이다.

기후경제는 기후변화를 경제활동의 중심에 두는 접근법이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이 경제 정책의 최우선 목표가 되고, 모든 경제활동은 기후 영향을 고려해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환경 규제를 강화하는 것을 넘어서 경제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탄소세와 탄소국경세다. 탄소 배출에 비용을 부과해서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친환경적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2026년부터 탄소국경세를 본격 도입할 예정이고, 이는 전 세계 무역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도 가속화되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비용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이제는 석탄 화력발전보다도 경제적이 되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전 세계 전력 생산의 42%가 재생에너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발표했다.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도 주목할 만하다. 테슬라의 성공에 자극받은 전통 자동차 기업들이 전기차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현대차그룹도 2030년까지 전기차 170만 대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자동차 산업만의 변화가 아니라 석유 산업, 배터리 산업, 충전 인프라 산업 등 연관 산업 전체의 재편을 의미한다.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도 중요한 트렌드다. 기존의 '생산-소비-폐기' 모델에서 벗어나 '생산-소비-재활용-재생산'의 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2020년 순환경제 행동계획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폐기물을 50%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녹색전환 과정에서 새로운 불평등 문제도 나타나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석탄 산업이나 내연기관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고, 탄소세 부담이 저소득층에게 더 클 수 있다. 따라서 녹색전환은 사회적 형평성을 고려해서 추진되어야 한다.

AI 경제의 도래와 노동의 미래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2022년 말 ChatGPT가 공개된 이후 불과 1년 만에 AI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제 AI는 단순 반복 작업을 넘어서 창작, 분석, 판단 등 고차원적 인지 능력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는 노동시장과 경제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자동화의 확산이다. 제조업에서 시작된 자동화가 이제 서비스업으로 확산되고 있다. 은행의 텔러, 여행사 직원, 번역가, 회계사 등 화이트칼라 직종도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향후 20년 내에 전체 일자리의 47%가 자동화될 위험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모든 일자리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도 만들어낸다. AI 개발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AI 윤리 전문가 등 AI 관련 직종이 급성장하고 있다. 또한 AI와 협업하는 새로운 직업들도 나타나고 있다. 의사가 AI 진단 도구를 활용하거나, 교사가 AI 학습 플랫폼을 이용하는 식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일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재정의다. AI가 많은 업무를 대신하게 되면 인간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창의성, 공감 능력, 윤리적 판단 등 인간 고유의 능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돌봄 서비스, 예술 활동, 교육, 상담 등 인간적 접촉이 중요한 영역은 오히려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플랫폼 경제의 확산도 주목할 만하다. 우버, 에어비앤비 같은 기존 플랫폼을 넘어서 AI 기반의 새로운 플랫폼들이 등장하고 있다. 개인이 AI 도구를 활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창작자 경제'가 더욱 발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AI 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불평등 문제가 심화될 우려도 크다. AI 기술을 보유한 소수의 기업과 개인이 막대한 부를 독점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AI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계층은 더욱 소외될 수 있다. 따라서 AI 교육의 보편화와 디지털 격차 해소가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기본소득과 새로운 사회계약

AI로 인한 대량 실업 가능성과 기후위기로 인한 경제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다. 이는 단순한 복지 정책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계약의 성격을 갖는다.

기본소득의 지지자들은 여러 가지 논리를 제시한다. 첫째, AI로 인한 기술적 실업에 대한 대응이다.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더라도 기본소득이 있으면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 창의성과 혁신의 촉진이다. 생계 걱정 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셋째, 노동의 선택권 확대다.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므로 노동조건이 개선될 수 있다.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핀란드는 2017-2018년 2천 명의 실업자를 대상으로 기본소득 실험을 실시했다. 결과는 고용률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정신건강과 삶의 만족도는 개선되었다는 것이었다. 케냐에서는 GiveDirectly라는 NGO가 1만 명을 대상으로 1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경기도는 2019년부터 청년기본소득을 시행하고 있고, 서울시도 청년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은 사실상 한시적 기본소득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재원 조달이다. 전 국민에게 월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면 연간 300조 원 이상이 필요하다. 이는 현재 정부 예산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또한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런 한계를 고려해 부분 기본소득이나 참여소득 같은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 부분 기본소득은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만 지급하는 것이고, 참여소득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새로운 경제 지표

기존의 GDP 중심 경제 평가에 대한 한계가 지적되면서, 새로운 경제 지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는 이런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2015년 채택된 SDGs는 2030년까지 달성해야 할 17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SDGs는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포용성과 환경 지속가능성을 함께 고려한다. 빈곤 퇴치, 양질의 교육, 성평등, 깨끗한 에너지, 기후행동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는 경제 발전의 목표 자체를 재정의하는 것이다.

새로운 경제 지표들도 개발되고 있다. 국민총행복지수(GNH), 진정진보지표(GPI), 인간개발지수(HDI)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소득 수준뿐만 아니라 환경 질, 사회적 결속, 삶의 만족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가 가장 유명하다. 부탄은 GDP 성장보다는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환경 보전, 문화 보존, 좋은 거버넌스, 균형 잡힌 발전 등 4개 영역에서 국민의 행복을 측정한다.

OECD도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를 개발했다. 주거, 소득, 일자리, 공동체, 교육, 환경, 시민참여, 건강, 삶의 만족, 안전, 워라밸 등 11개 영역을 평가한다. 한국은 경제적 지표는 높지만 워라밸과 삶의 만족도는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다.

이런 새로운 지표들은 정책 방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뉴질랜드는 2019년 세계 최초로 '웰빙 예산'을 편성했다. 예산 배분을 GDP 성장보다는 국민의 웰빙 향상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정신건강, 아동빈곤, 원주민 문제, 기후변화 등 4개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지역경제와 로컬라이제이션

글로벌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역경제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지역 자급자족 능력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있다. 또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도 장거리 운송을 줄이고 지역 내 생산과 소비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로컬 푸드 운동이 대표적이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푸드 마일리지를 줄이고 지역 농업을 살리는 효과가 있다. 한국에서도 로컬푸드 직매장이 늘어나고 있고, 학교급식에서 로컬푸드 사용을 확대하고 있다.

지역화폐도 주목받고 있다. 지역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화폐를 통해 지역 경제 순환을 촉진하는 것이다. 성남시의 성남사랑상품권, 서울시의 서울사랑상품권 등이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도 대부분 지역화폐로 지급되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이들은 이윤 극대화보다는 사회적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한다. 에너지 협동조합, 돌봄 협동조합, 로컬푸드 협동조합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도전과 기회

한국은 미래 경제 의제에 대응하는 데 있어 독특한 위치에 있다. 한편으로는 높은 기술 수준과 빠른 적응력을 갖고 있어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 중심의 경제 구조와 높은 탄소 배출로 인해 큰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K-그린뉴딜과 디지털뉴딜은 한국 정부의 대응 전략이다. 2025년까지 160조 원을 투자해 탄소중립과 디지털 전환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재생에너지 확대, 그린 모빌리티 보급, 스마트 그린도시 조성 등이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탄소 배출량이 세계 8위로 높고, 제조업 비중이 높아 탈탄소화가 어렵다. 또한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있어 성장 동력 확보가 시급하다.

AI 분야에서는 상당한 잠재력을 보이고 있다. 삼성, LG, 네이버, 카카오 등 대기업들이 AI 투자를 확대하고 있고, 정부도 AI 국가전략을 통해 2030년까지 AI 강국 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 더욱 적극적인 투자와 혁신이 필요하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불평등 해소가 가장 큰 과제다. AI와 기후변화로 인한 경제 구조 변화 과정에서 취약계층이 더욱 소외되지 않도록 사회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기술과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의 혁신도 필요하다.

결론

탈성장, 기후경제, AI 경제로 대표되는 미래 경제의 새로운 의제들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나 정책적 조정의 차원을 넘어서 경제 시스템과 사회 가치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인식하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새로운 녹색 산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AI는 인간의 창의성을 더욱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탈성장은 삶의 질 향상과 사회적 연대 강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정부, 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하고,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 경쟁과 성장보다는 협력과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확산되어야 한다.

미래 경제는 더 이상 소수의 전문가나 정책결정자만의 영역이 아니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공동의 과제다. 경제사회학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미래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우리 모두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다. 경제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다. 따라서 인간이 바꿀 수 있다. 더 공정하고 지속가능하며 인간다운 경제를 만드는 것, 그것이 경제사회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이자 우리 시대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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