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Science

정치제도론 3. 행태혁명과 잃어버린 제도: 알몬드와 버바의 정치문화론부터 이스턴의 시스템 이론까지

SSSCHS 2025. 5. 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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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태주의 혁명의 도래

1950년대와 1960년대 정치학계를 휩쓴 행태주의 혁명은 정치 연구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전까지 정치학이 주로 제도의 형식적 구조와 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행태주의자들은 실제 정치 행위자들의 태도, 신념, 행동을 연구의 중심에 놓았다. 이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정치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행태주의 혁명의 배경에는 몇 가지 중요한 지적,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첫째,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실증주의적 방법론이 확산되었다. 둘째, 여론조사와 통계 기법의 발전으로 대규모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가능해졌다. 셋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체제의 차이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행태주의자들은 정치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그들은 제도보다는 제도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에 주목했고, 이를 통해 정치 현상을 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몬드와 버바의 정치문화론

가브리엘 알몬드와 시드니 버바의 『시민문화』는 행태주의 정치학의 대표작이다. 이들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멕시코 5개국을 비교 연구하면서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정치 제도 자체보다는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와 가치관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알몬드와 버바는 정치문화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째, 향리형(parochial) 문화는 정치 체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둘째, 신민형(subject) 문화는 정치 체제의 산출(정책)은 인식하지만 투입(참여) 과정에는 무관심한 상태다. 셋째, 참여형(participant) 문화는 정치 과정의 투입과 산출 모두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균형 있게 혼합된 '시민문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지나친 참여는 체제에 과부하를 일으킬 수 있고, 지나친 무관심은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 따라서 적절한 수준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 그리고 정치 체제에 대한 신뢰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문화론은 제도 중심의 접근법에서 벗어나 정치의 문화적, 심리적 차원을 부각시켰다. 같은 민주주의 제도라도 그것이 작동하는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통찰은 비교정치학의 지평을 넓혔다.

데이비드 이스턴의 시스템 이론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 체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이론적 틀을 제시했다. 그의 시스템 이론은 정치를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의 순환 과정으로 설명한다. 시민들의 요구(demands)와 지지(support)가 정치 체계로 투입되면, 체계는 이를 처리하여 정책 결정과 같은 산출을 만들어낸다.

이스턴의 모델에서 정치 체계는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 체계는 자기 보존을 위해 적응하고 변화하는 동적 특성을 가진다. 특히 중요한 것은 피드백(feedback) 메커니즘인데, 산출된 정책이 다시 새로운 요구와 지지 또는 반대를 만들어내는 순환 과정이다.

이스턴의 접근법에서 주목할 점은 정치 체계를 '블랙박스'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즉, 체계 내부의 구체적인 제도나 과정보다는 전체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제도의 구체적 특성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이스턴의 시스템 이론은 정치 현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제공했다. 특히 정치 체계의 안정성과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분석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행태주의의 방법론적 특징

행태주의는 정치학에 과학적 엄밀성을 도입하려 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원칙을 강조했다:

첫째, 경험적 관찰이 가능한 현상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논의보다는 측정 가능한 행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둘째, 체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통계적 분석을 통해 일반화 가능한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 개별 사례보다는 대규모 표본을 통한 패턴 분석이 중요하다.

셋째, 가치중립적 연구를 지향해야 한다. 연구자의 주관적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 분석에 충실해야 한다.

넷째, 이론과 경험적 연구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론은 경험적 검증을 거쳐야 하고, 경험적 발견은 이론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엄격성은 정치학의 과학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연구 대상과 방법의 제약을 가져왔다. 특히 제도와 같은 복잡하고 역사적인 현상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행태주의가 제도 연구에 미친 영향

행태주의 혁명은 제도 연구를 주변화시켰다. 제도는 단지 정치 행위의 배경이나 맥락으로 취급되었고,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인과적 힘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행태주의자들은 제도보다는 개인의 태도와 행동이 정치 현상을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은 몇 가지 문제점을 낳았다. 첫째, 같은 정치 문화나 행태를 가진 사회들 사이에서도 제도적 차이가 다른 정치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둘째, 제도가 개인의 행동과 선호를 형성하는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셋째, 제도의 역사적 발전과 경로의존성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행태주의가 제도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도 있다. 형식적 제도 분석을 넘어서 제도의 실제 작동 방식에 주목하게 했고, 경험적 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제도와 행위자의 상호작용이라는 중요한 연구 주제를 제기했다.

구조기능주의와 제도

행태주의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접근법은 구조기능주의였다. 탈콧 파슨스의 영향을 받은 정치학자들은 정치 체계의 다양한 구조들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에 주목했다. 알몬드는 정치 체계의 기능을 투입 기능(정치사회화, 이익표출, 이익집약)과 산출 기능(규칙제정, 규칙적용, 규칙판결)으로 구분했다.

이러한 접근은 비교정치학에 유용한 분석틀을 제공했다. 서로 다른 정치 체계들도 유사한 기능을 수행해야 하므로, 이 기능들이 어떤 구조를 통해 수행되는지 비교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익표출 기능은 민주주의에서는 정당과 이익집단을 통해,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된다.

하지만 구조기능주의도 제도의 독자적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제도는 단지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로 간주되었고, 제도 자체의 논리나 역사적 발전 과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정치발전론과 제도

1960년대에는 신생 독립국들의 정치 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정치발전론자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정치 제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연구했다. 새뮤얼 헌팅턴은 『변화하는 사회의 정치질서』에서 정치 제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는 주류 행태주의와는 다소 다른 입장이었다.

대부분의 정치발전론자들은 경제 발전, 사회 동원, 정치 문화의 변화가 정치 발전의 주요 동인이라고 보았다. 제도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제도의 독자적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행태주의의 한계와 비판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행태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첫째, 지나친 방법론적 개인주의로 인해 구조적, 제도적 요인을 경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둘째, 정치의 역사적, 맥락적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셋째, 가치중립성을 강조한 나머지 정치학의 규범적 차원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1960년대 말의 정치적 격변(민권운동, 반전운동, 학생운동 등)은 행태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행태주의는 정치적 안정과 점진적 변화는 잘 설명할 수 있었지만, 급격한 정치 변동이나 구조적 갈등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제도의 재발견을 향하여

행태주의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제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학자들은 제도가 단순히 개인 행동의 배경이 아니라 행동을 형성하고 제약하는 독립적인 힘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동일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제도적 규칙과 절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이 커졌다. 셋째, 역사적 제도주의자들이 제도의 경로의존성과 역사적 발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행태주의 유산의 지속적 영향

행태주의가 쇠퇴했다고 해서 그 유산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정치학은 여전히 행태주의의 많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경험적 연구 방법, 체계적인 데이터 수집과 분석, 이론과 경험의 결합 등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연구 규범으로 남아있다.

더욱이 제도와 행태의 상호작용은 현대 정치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다. 제도가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개인들의 행동이 제도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동시에 고려하는 연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행태주의 시대의 교훈

행태주의 시대는 정치학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첫째, 정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제도, 문화, 행태는 모두 중요하며, 이들의 상호작용을 포착해야 한다. 둘째, 방법론적 엄밀성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연구 대상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셋째, 정치학은 경험적 연구와 규범적 고찰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결국 행태주의 혁명은 정치학의 과학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제도 연구의 중요성을 일시적으로 간과하게 만들었다. 이후 등장한 신제도주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행태주의의 긍정적 유산을 계승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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