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와 신마르크스주의의 등장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가 예측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 혁명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 중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적 번영, 복지국가의 발전, 노동계급의 체제 내 통합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측과 상반된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상황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가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920년대부터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를 통틀어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 또는 '서구 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라고 부른다. 신마르크스주의는 단일한 이론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람시주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분석적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흐름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이 글에서는 특히 계급과 국가의 관계,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어떻게 계급 지배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신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론, 풀란차스의 상대적 자율성 개념, 에릭 올린 라이트의 모순적 계급 위치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알튀세르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지배의 문화적 차원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는 1960-70년대에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를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그의 이론 중 특히 중요한 것이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s)와 '억압적 국가장치'(Repressive State Apparatus, RSA)의 구분이다.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구분
알튀세르는 1970년 발표한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국가 권력의 두 가지 작동 방식을 구분했다:
- 억압적 국가장치(RSA): 물리적 강제력을 통해 작동하는 국가 기구들로, 군대, 경찰, 법원, 교도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주로 '폭력'(물리적이든 비물리적이든)을 통해 지배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억압한다.
-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s): 이데올로기를 통해 작동하는 기구들로, 교육 시스템, 종교 기관, 가족, 법적 체계, 정당 시스템, 노동조합, 미디어, 문화 기관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주로 '동의'와 '설득'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내면화시킨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거 봉건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 장치였던 교회를 대신해 교육 시스템이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로 부상했다. 학교는 단순히 기술적 지식과 기능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행동 규범, 태도, 가치관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주체를 생산한다.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 주체의 호명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거짓 의식'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 호명(interpellation):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작동한다. 예를 들어, 학생은 교육 제도에 의해 '학생'으로 호명되면서 그에 맞는 정체성과 행동 양식을 내면화한다.
- 자명성의 효과: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와 배열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든다. 예를 들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한다.
- 상상적 관계의 재현: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실제 물질적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재현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알튀세르의 관점은 계급 지배가 단순히 경제적 착취나 물리적 강제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동의의 제조'를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유지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
알튀세르의 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작동을 관찰할 수 있다:
- 교육 시스템: 한국의 입시 중심 교육과 학벌주의는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 경쟁, 서열화, 성과주의 등의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 미디어와 대중문화: 신문, 방송,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등은 특정한 라이프스타일, 성공의 기준, 소비 패턴 등을 자연스럽게 제시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정상화한다. '흙수저에서 금수저로'라는 성공 서사나 '자수성가한 기업가' 신화 등은 계급 이동의 가능성을 과장하고 현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발전을 제한한다.
- 가족 제도: 한국의 가족 제도는 전통적으로 위계적 권위 구조와 젠더 역할을 내면화시키는 중요한 장치였다. 현대에는 '교육열'과 '자녀 스펙 관리'를 통해 계급 재생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가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라는 목표가 체제에 대한 순응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 기업 문화와 직장 이데올로기: '기업가 정신', '회사 충성도', '팀워크', '열정 페이' 등의 개념은 노동자들에게 특정한 행동 양식과 태도를 요구하면서, 노동 강도 강화와 불안정한 고용 조건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은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며,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와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니코스 풀란차스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그리스 출신의 프랑스 사회학자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 1936-1979)는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과 기능에 대한 더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정치권력과 사회계급』(1968), 『계급들: 현대 자본주의』(1974), 『국가, 권력, 사회주의』(1978) 등이 있다.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개념
풀란차스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 of the state)이다. 이는 국가가 단순히 지배 계급의 도구가 아니라, 일정한 독자성과 자율성을 가지고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자본 분파들 간의 중재자: 자본가 계급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산업 자본, 금융 자본, 상업 자본 등 다양한 분파로 나뉘며, 이들 사이에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발생한다. 국가는 이러한 다양한 자본 분파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타협점을 찾는 역할을 한다.
- 계급 지배의 장기적 이익 보장: 국가는 개별 자본가나 특정 자본 분파의 단기적 이익보다는 자본가 계급 전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때로는 이를 위해 특정 자본 분파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 피지배 계급의 양보와 통합: 국가는 피지배 계급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체제에 대한 급진적 도전을 방지하고, 그들을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풀란차스에 따르면, 국가의 이러한 상대적 자율성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생존과 안정에 기여한다. 국가가 단순히 지배 계급의 직접적인 도구로만 기능했다면, 체제는 훨씬 더 많은 저항과 불안정에 직면했을 것이다.
권력 블록과 헤게모니 분파
풀란차스는 '권력 블록'(power bloc)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양한 지배적 계급과 계급 분파들이 어떻게 연합을 형성하는지 분석했다:
- 권력 블록의 구성: 권력 블록은 자본가 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산업, 금융, 상업 자본 등)과 때로는 지주나 소부르주아 같은 다른 소유 계급들까지 포함하는 연합이다.
- 헤게모니 분파: 권력 블록 내에서는 특정 분파가 '헤게모니'(주도권)를 장악하고, 자신의 이익을 '일반적 이익'으로 제시하면서 다른 분파들의 이익을 일정 수준 수용하는 방식으로 지도력을 발휘한다.
- 국가와 권력 블록의 관계: 국가는 권력 블록 내 다양한 분파들의 갈등을 중재하고, 헤게모니 분파의 장기적 지도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분석은 자본주의 국가가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집행위원회'가 아니라, 복잡한 계급 연합과 타협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국가 상대적 자율성과 권력 블록
풀란차스의 개념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현상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 발전국가와 상대적 자율성: 1960-80년대 한국의 발전국가는 강력한 상대적 자율성을 보여주었다. 국가는 단순히 재벌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재벌을 포함한 다양한 자본 분파들을 국가 주도 산업화 전략에 동원했다. 국가는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특정 산업에 자원을 선택적으로 배분하며, 때로는 개별 기업의 이익에 반하는 구조조정도 추진했다.
- 권력 블록의 변화: 한국의 권력 블록은 시기별로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 1960-70년대: 관료-재벌-군부의 삼각동맹, 수출 중심 제조업 자본의 헤게모니
- 1980-90년대: 재벌의 영향력 확대, 금융 자유화와 함께 금융 자본의 영향력 증가
-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제 금융 자본의 영향력 강화, 재벌 내부의 금융-제조업 분파 간 갈등
- 2000년대 이후: IT·플랫폼 기업의 부상, 전통 제조업과 새로운 디지털 자본 간의 경쟁과 갈등
- 피지배 계급 통합 전략: 한국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피지배 계급을 체제에 통합해왔다.
- 1960-70년대: '선성장 후분배' 이데올로기, 반공주의를 통한 노동 통제
- 1980-90년대: 민주화 요구의 부분적 수용, 노동법 개정을 통한 제한적 노동권 인정
- 1997년 이후: 사회안전망 확충, 비정규직 보호법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부작용 완화 정책
- 2010년대 이후: 최저임금 인상, 청년 정책 등을 통한 불평등 완화 시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국가는 단순히 '재벌의 도구'나 '지배 계급의 대리인'이 아니라, 다양한 계급과 계급 분파 간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작동해왔다고 볼 수 있다.
에릭 올린 라이트와 모순적 계급 위치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 1947-2019)는 현대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의 대표적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특히 '분석적 마르크스주의'(Analytical Marxism) 흐름에 속하며, 엄밀한 경험적 연구와 개념적 명확성을 통해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계급 구조와 소득 결정』(1979), 『계급』(1985), 『계급 분석에 대한 접근』(1997) 등이 있다.
모순적 계급 위치의 개념
라이트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모순적 계급 위치'(contradictory class locations)이다. 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계급 모델(자본가 vs 노동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중간 계층들의 복잡한 위치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 착취 관계의 다차원성: 라이트는 착취가 단순히 생산수단 소유 여부만이 아니라, 조직적 자산(조직 내 권한과 통제력)과 기술/자격 자산(지식, 자격증, 전문 기술)에 기반해서도 발생한다고 보았다.
- 모순적 위치의 유형: 이러한 관점에서 라이트는 다음과 같은 모순적 계급 위치를 식별했다.
- 관리자와 감독자: 노동 과정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생산수단은 소유하지 않은 위치
- 반자율적 피고용인(전문직): 자신의 노동 과정에 대한 상당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으나, 타인의 노동은 통제하지 않는 위치
- 소고용주: 소수의 피고용인을 고용하지만, 대자본가처럼 완전히 경영에서 물러나지는 못하는 위치
- 반자율적 경영자: 생산수단의 일부를 소유하고 경영에 참여하지만, 외부 주주나 이사회의 통제를 받는 위치
- 계급 구조의 복잡성: 라이트는 이러한 모순적 계급 위치들이 단순히 '과도기적' 현상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모순된 이해관계와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가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이 아니라, 복잡한 위계와 중첩된 착취 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계급 구조의 경험적 분석
라이트의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추상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회의 계급 구조를 경험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구체적인 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 12분류 계급 모델: 라이트는 생산수단 소유 여부, 조직적 자산(권한), 기술/자격 자산이라는 세 가지 차원을 조합하여 12개의 계급 위치를 분류했다.
- 국제 비교 연구: 라이트는 '계급 구조와 계급 의식 비교 프로젝트'(CCCP)를 통해 여러 국가의 계급 구조와 계급 의식을 비교 연구했다.
- 계급 이동성 분석: 라이트는 이러한 복잡한 계급 모델을 바탕으로, 세대 간·세대 내 계급 이동 패턴을 분석했다.
이러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라이트는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이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아니라, 실제 사회 현실을 설명하고 검증 가능한 가설을 제시할 수 있는 과학적 이론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한국 사회의 모순적 계급 위치들
라이트의 개념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다양한 모순적 계급 위치들을 식별할 수 있다:
- 재벌 기업 경영자/임원: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지는 않지만, 조직 내 높은 권한과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상당한 특권과 보상을 누리는 위치. 이들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동시에 고용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 고소득 전문직(의사, 변호사, 교수 등):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과 자격을 보유하여 상당한 자율성과 높은 소득을 누리지만, 기본적으로는 피고용인이거나 조직의 제약 속에서 일하는 위치.
- 중소기업 자영업자: 소규모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소수의 직원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대자본과의 경쟁에서 취약하고 종종 특정 대기업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위치.
- 중간 관리자: 하위 직원들에 대한 통제와 감독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상급 관리자나 경영진의 지시를 받고 기업 정책에 제한적인 영향력만 행사할 수 있는 위치.
- 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과 높은 임금을 누리지만, 여전히 자본가에 의해 착취되는 위치. 특히 대기업 정규직은 노동계급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모순적 계급 위치들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단순한 '자본 vs 노동' 구도를 넘어서는 다양한 정치적 지향과 연합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신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의 현대적 적용
지금까지 살펴본 알튀세르, 풀란차스, 라이트의 이론은 각각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의 다른 측면을 발전시키고 현대화했다. 이러한 신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와 불평등을 이해하는 데 어떤 통찰을 제공할 수 있을까?
현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 분석
신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현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를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 재벌 체제와 자본 분파: 한국의 경제 구조는 재벌 대기업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풀란차스의 관점에서 볼 때, 재벌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자본 분파(제조업, 금융, 서비스업, IT/플랫폼 등)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협력과 갈등이 공존한다. 국가는 이러한 다양한 자본 분파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전체 자본가 계급의 장기적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 노동 시장 분절화와 계급 내 균열: 라이트의 관점에서 한국의 노동계급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 중소기업 정규직, 비정규직,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 다양한 층위로 분화되어 있다. 이러한 분화는 노동계급 내부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모순적 계급 위치에 있는 집단들(예: 대기업 정규직)이 때로는 자본의 이해관계에 부분적으로 동조하게 만든다.
- 이데올로기적 통합 메커니즘: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는 입시 교육, 기업 문화, 대중 미디어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를 통해 계급 모순을 은폐하고 체제에 대한 동의를 만들어낸다. '공정한 경쟁', '능력주의', '자기계발', '성공 신화' 등의 담론은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고,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발전을 제한한다. 특히 '수저계급론'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개천에서 용 난다'는 성공 서사와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는 구조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도 체제에 대한 동의를 유지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작용한다.
국가와 자본의 관계 변화
신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현대 한국 사회의 국가-자본 관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 1960-80년대 한국의 국가는 강력한 발전국가로서 자본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국가의 역할은 시장 원리를 촉진하고 자본의 글로벌 경쟁력을 지원하는 신자유주의적 국가로 변화했다. 풀란차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권력 블록 내에서 금융 자본과 국제화된 산업 자본의 헤게모니가 강화된 결과로 볼 수 있다.
- 재벌의 영향력 확대와 국가의 자율성 약화: 민주화 이후 대기업 집단의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었다. 재벌 그룹은 단순한 경제 행위자를 넘어, 미디어 소유, 싱크탱크 후원, 로비 활동 등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국가는 여전히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범위는 과거에 비해 축소되었다.
- 계급 타협의 제도화와 한계: 1987년 민주화 이후 노동법 개정, 사회보장제도 확충, 최저임금 인상 등 일정한 계급 타협이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청년 실업자 등 취약 계층의 이해관계는 충분히 대변되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 자본주의와 계급 구조의 새로운 변화
21세기 들어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플랫폼 경제의 확산은 계급 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 플랫폼 자본과 데이터 추출: 기존의 산업 자본이 노동력의 착취를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했다면, 플랫폼 자본은 이용자 데이터의 추출과 상품화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창출한다. 카카오, 네이버, 배달의민족 같은 플랫폼 기업들은 이용자와 노동자의 활동으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다.
- 긱 이코노미와 새로운 노동 형태: 라이더, 대리기사, 가사도우미 등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중개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고용 관계에 속하지 않아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라이트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모순적 계급 위치'를 차지한다.
- 디지털 기술과 계급 통제의 새로운 형태: 인공지능, 빅데이터, 알고리즘 등 디지털 기술은 노동 과정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 콜센터 상담원의 통화 모니터링, 물류센터 노동자의 동선 추적, 플랫폼 노동자의 실시간 성과 평가 등은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통제와 물리적 감시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노동 통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계급 정치와 대안적 전략의 모색
신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안적인 정치적 전략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현대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이들의 통찰은 어떤 대안적 정치 전략을 시사하는가?
계급 연합과 대항 헤게모니 구축
풀란차스의 관점에서, 대안적 정치 프로젝트는, 지배적인 권력 블록에 대항하는 새로운 계급 연합과 헤게모니 구축을 필요로 한다:
-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 극복: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제조업-서비스업 등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공통의 이해관계와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맥락에서 특히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기존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 등 취약 노동자층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 진보적 중산층과의 연대: 교사, 공무원, 전문직, 문화예술인 등 '모순적 계급 위치'에 있는 진보적 중산층과의 연대를 통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한 물질적 이해관계를 넘어, 민주주의, 환경, 젠더 평등 등의 가치에 기반한 연대 가능성을 갖고 있다.
- 다양한 사회운동과의 접합: 환경운동, 페미니즘, 인권운동, 반전평화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과 계급 정치의 접합을 통해, 보다 포괄적인 대안적 정치 프로젝트를 구축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재분배를 넘어, 생태적 지속가능성, 젠더 정의, 인권 존중 등의 가치를 포함하는 종합적 비전을 제시한다.
대안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치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이데올로기 구축은 정치 투쟁의 중요한 부분이다:
- 지배 이데올로기의 해체: '능력주의', '자수성가', '공정한 경쟁' 등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모순과 한계를 폭로하고,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담론에 대항하는 비판적 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대안적 문화와 공간의 구축: 주류 미디어, 교육 기관, 대중문화를 통해 재생산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독립 미디어, 대안적 교육 프로그램, 진보적 문화 활동 등을 통해 대안적 가치와 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
- 일상 생활에서의 정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일상적 실천을 통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직장, 가정, 학교 등 일상 생활에서의 관계와 실천을 변화시키는 '미시정치'도 중요한 정치적 전략이 될 수 있다.
제도적 개입과 구조적 개혁
라이트는 후기 저작에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real utopias)라는 개념을 통해, 현존 제도 내에서도 대안적 경제·사회 구조의 씨앗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 자본주의적 기업의 대안으로서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공유경제 등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경제 조직을 확장하는 전략이다. 한국에서도 청년 협동조합, 마을기업,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등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 노동 중심의 제도 개혁: 노동시간 단축, 기본소득 도입, 산업 민주주의 확대 등을 통해 노동자의 협상력과 자율성을 강화하는 제도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 공공 영역의 민주화: 국가와 공공 영역을 단순히 '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민주화하고 변형하여 사회적 필요와 공공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이는 공공 서비스의 확대, 참여 예산제, 시민 감시 기구 등 다양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다.
결론: 신마르크스주의와 21세기 불평등 연구의 과제
이 글에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론, 풀란차스의 상대적 자율성 개념, 에릭 올린 라이트의 모순적 계급 위치론을 중심으로 신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론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와 국가-자본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불평등 연구에 있어 신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기여할 수 있는 핵심적인 통찰은 다음과 같다:
- 구조적 접근의 중요성: 불평등을 단순한 개인 간의 차이나 정책적 실패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특성과 권력 관계의 결과로 이해하는 관점이 중요하다.
- 복합적 계급 분석의 필요성: 단순한 이분법적 계급 모델(자본가 vs 노동자)을 넘어, 다양한 계급 분파와 모순적 계급 위치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계급 분석이 필요하다.
- 국가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이해: 국가를 단순히 중립적 중재자나 공공선의 수호자로 보는 관점을 넘어, 계급 권력 관계의 산물이자 자본주의 체제 유지의 핵심 기구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 이데올로기와 문화의 중요성: 불평등과 계급 지배가 단순한 경제적·물리적 강제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통한 '동의의 제조'를 통해서도 유지된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 대안적 가능성의 모색: 비판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현존 체제 내에서도 대안적 경제·사회 관계의 씨앗을 만들어가는 실천적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신마르크스주의 이론도 완벽하지 않으며 여러 한계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예를 들어, 계급 환원주의의 위험, 젠더·인종·문화적 정체성 등 비계급적 요소들의 상대적 간과, 그리고 대안적 체제의 구체적 청사진 제시의 부족 등이 지적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과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강력한 분석 도구를 제공한다. 특히 21세기 들어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기후위기, 팬데믹, 디지털 전환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대안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신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 사회 역시 재벌 중심 경제구조, 노동시장 이중화, 자산 불평등 심화, 세대 간 갈등 등 복합적인 불평등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깊이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불평등의 원인과 메커니즘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신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계속해서 발전되고 적용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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