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은 왜 중요한가
2022년 브라질 대선에서 룰라가 극적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가 이끄는 노동자당(PT)은 부패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여전히 견고한 지지 기반을 유지했다. 반면 같은 시기 페루에서는 불과 5년 사이에 6명의 대통령이 바뀌었고, 정당들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왜 어떤 나라의 정당은 강하고, 어떤 나라의 정당은 약한 걸까?
정당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기관이다. 시민의 요구를 집약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며, 정부를 구성하고 견제한다. 하지만 모든 정당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의 제도화 수준에 따라 민주주의의 질이 크게 달라진다.
메인웨어링과 스컬리의 정당 제도화 이론
스콧 메인웨어링(Scott Mainwaring)과 티모시 스컬리(Timothy Scully)는 1995년 라틴아메리카 정당 체계를 연구하면서 '정당 체계 제도화(party system institutionalization)'라는 개념을 체계화했다. 그들은 정당 제도화를 네 가지 차원에서 측정했다.
정당 간 경쟁의 안정성
첫 번째는 정당 간 경쟁 패턴의 안정성이다. 제도화된 정당 체계에서는 주요 정당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선거 결과의 변동성이 낮다. 예를 들어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150년 넘게 양당제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약하게 제도화된 체계에서는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등장하고 기존 정당이 사라진다. 페루나 과테말라가 대표적이다. 이런 국가에서는 유권자들이 매 선거마다 낯선 정당과 후보를 만나게 된다.
정당의 사회적 뿌리
두 번째는 정당이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가다. 강한 정당은 특정 사회집단이나 이념과 안정적인 연계를 맺는다. 유럽의 사회민주당들이 노동계급과, 기독민주당들이 가톨릭 유권자와 맺는 관계가 좋은 예다.
사회적 뿌리가 약한 정당은 선거 때마다 다른 집단에 호소하며, 유권자들도 정당 일체감이 약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포퓰리즘이나 개인 중심의 정치가 발달하기 쉽다.
정당과 선거의 정당성
세 번째는 정치 행위자들이 정당과 선거를 민주적 경쟁의 정당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다. 제도화된 체계에서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얻으려면 반드시 정당을 통해야 하고, 선거 결과를 수용한다.
하지만 약한 제도화 상황에서는 군부 쿠데타, 자경단, 거리 시위 등 비제도적 수단이 빈번하게 동원된다. 선거 결과에 불복하거나 정당 밖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일이 흔하다.
정당 조직의 자율성
마지막은 정당 조직이 개별 지도자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인가다. 제도화된 정당은 명확한 규칙과 절차를 갖추고 있으며, 특정 인물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정당의 정체성과 조직은 유지된다.
반대로 약하게 제도화된 정당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지도자가 사라지면 정당도 함께 몰락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페루의 후지모리가 만든 정당들이 이런 특징을 보인다.
레비츠키의 비공식 제도 관점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는 메인웨어링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정당들이 공식적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비공식 제도의 역할
레비츠키가 주목한 것은 클라이언텔리즘(clientelism), 즉 후견-수혜 관계다. 아르헨티나의 페론당은 공식 조직은 취약하지만, 노동조합, 지역 보스, 사회운동 조직 등과의 비공식적 연계를 통해 강력한 동원력을 유지한다.
이런 비공식 제도는 양면성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민주적 책임성을 약화시키고 부패를 조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 계층의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사회 통합에 기여하기도 한다.
제도화의 다양한 경로
레비츠키의 연구는 정당 제도화가 반드시 서구적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각 사회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제도화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정당이 시민과 국가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지 여부다.
아시아의 정당 정치: 다양성과 특수성
아시아의 정당 체계는 서구나 라틴아메리카와는 또 다른 특징을 보인다. 일본의 자민당처럼 장기 집권하는 지배정당, 인도의 지역 기반 정당들, 대만의 정체성 중심 정당 체계 등 다양한 모습이 공존한다.
발전국가와 정당 정치
동아시아의 발전국가들에서는 경제 성장이 정당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일본 자민당, 싱가포르 인민행동당, 말레이시아 UMNO 등은 경제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장기 집권했다. 하지만 경제 위기나 성장 둔화는 이들 정당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민주화와 정당 체계의 변화
한국과 대만은 민주화 이후 정당 체계가 극적으로 변화했다. 권위주의 시대의 지배정당이 민주적 정당으로 전환되었고,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지역주의가 정당 체계를 구조화하는 주요 균열선으로 작용했다.
한국 정당 정치의 제도화 수준
한국의 정당 체계는 어느 정도 제도화되었을까? 메인웨어링의 기준으로 보면 혼합적인 모습을 보인다.
불안정한 정당 체계
한국 정당들은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1990년 3당 합당, 1995년 민주자유당에서 신한국당으로의 개편,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등 주요 정당의 이름과 구성이 자주 바뀐다. 이는 제도화 수준이 낮다는 신호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대립 구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정당 이름은 바뀌어도 기본적인 정치 지형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연속성도 관찰된다.
약한 사회적 뿌리
한국 정당들의 사회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당원 수가 적고, 시민사회와의 유기적 연계도 부족하다. 대신 지역주의가 정당 지지의 주요 기반으로 작용한다. 이는 정책이나 이념보다는 지역적 정체성이 투표 행태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최근에는 세대와 젠더가 새로운 정치적 균열로 부상하고 있다. 정당들이 이런 새로운 균열을 어떻게 대표하고 통합할지가 향후 한국 정당 정치의 과제다.
선거 중심의 제도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정착되었다. 정당들은 선거에서 경쟁하고, 패배한 정당은 결과를 수용한다. 군부 개입이나 폭력적 권력 투쟁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또한 정당법과 정치자금법 등 제도적 틀도 점차 정비되고 있다. 정당 국고보조금 제도는 정당의 재정적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디지털 시대의 정당 제도화
21세기 들어 정당 정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SNS의 발달로 정치인들이 정당을 거치지 않고 유권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정치 참여도 활발해졌다.
플랫폼 정당의 등장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디지털 정당'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정당 조직 대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당원을 모집하고 의사결정을 한다. 한국에서도 정의당이 '우리미래'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실험한 바 있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정당들은 시민 참여를 확대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온라인 포퓰리즘이나 극단주의에 취약하다는 우려도 있다.
개인화된 정치의 부상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정치인 개인의 브랜드가 정당보다 중요해지는 경향이 있다. 트럼프, 마크롱, 젤렌스키 등은 기존 정당 체계를 뛰어넘어 개인적 인기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현상은 정당 제도화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정당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적응하고 진화하도록 압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정당 제도화의 미래
정당 제도화는 민주주의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서구식 모델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 사회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제도화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정당이 시민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대표하고, 책임 있는 정부를 구성하며, 민주적 경쟁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식적 제도뿐 아니라 비공식적 관행과 정치문화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
한국 정당 정치의 과제
한국 정당들은 여전히 제도화의 과정에 있다. 지역주의 극복, 정책 정당으로의 발전, 당내 민주주의 강화 등이 주요 과제다. 동시에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치 참여 방식을 수용하면서도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
최근 청년 세대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이들이 기존 정당 체계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정당들이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정당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다. 강한 정당 없이는 강한 민주주의도 없다. 한국의 정당들이 더 성숙하고 제도화된 모습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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