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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제도론 7. 의회·행정부·대통령제 vs 내각제 - 권력구조의 정치학

SSSCHS 2025. 5. 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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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두 얼굴

2024년 미국 대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4년간 미국을 이끌 대통령이 결정되었지만,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여소야대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과 의회가 대립하면 정부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반면 영국이나 독일 같은 내각제 국가에서는 이런 걱정이 상대적으로 적다. 의회 다수당이 곧 정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갈등이 구조적으로 덜 발생한다. 하지만 정부가 의회의 신임을 잃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정성도 존재한다.

어떤 권력구조가 더 나은 것일까? 이 질문은 비교정치학의 오랜 화두였고,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린츠의 경고: 대통령제의 위험성

1990년 발표된 후안 린츠(Juan Linz)의 논문은 정치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대통령제가 민주주의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군사 쿠데타나 독재로 전락한 배경에 대통령제라는 제도적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린츠가 지적한 대통령제의 문제점은 크게 네 가지다.

이중 정당성(Dual Legitimacy)의 딜레마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과 의회가 각각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둘 다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할 때 누가 양보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미국에서 정부 셧다운이 반복되는 것도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내각제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의회가 유일한 민주적 정당성의 원천이고, 행정부는 의회의 신임에 기초해 구성된다. 갈등이 생기면 의회가 내각을 교체하거나, 내각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르면 된다.

경직성(Rigidity)의 문제

대통령제의 또 다른 특징은 임기가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무능하거나 인기가 없는 대통령이라도 임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탄핵이라는 절차가 있지만, 이는 극단적인 경우에만 사용되는 예외적 수단이다.

반면 내각제는 훨씬 유연하다. 총리가 의회의 신임을 잃으면 즉시 물러나야 한다. 영국의 경우 리즈 트러스 총리가 경제정책 실패로 불과 45일 만에 사임한 것이 좋은 예다. 이런 유연성은 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

승자독식(Winner-take-all)의 게임

대통령 선거는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단 한 명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패자가 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패자들의 불만을 키운다. 특히 다당제 상황에서 30-40%의 득표로 당선된 대통령이 나머지 60-70%의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내각제에서는 연립정부 구성을 통해 이런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기민당과 사민당의 대연정, 네덜란드의 4-5개 정당 연립정부 등이 좋은 예다. 더 많은 정치세력이 권력을 공유함으로써 사회통합을 도모할 수 있다.

아웃사이더의 등장

대통령제는 정치 경험이 없는 아웃사이더의 집권을 용이하게 한다. 트럼프, 젤렌스키, 윤석열 등이 그 예다. 이들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당선되지만, 정작 집권 후에는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내각제에서는 이런 일이 드물다. 총리가 되려면 먼저 의원이 되어야 하고, 당내에서 충분한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경험과 협상 능력을 쌓게 된다.

슈가트와 캐리의 반론: 대통령제의 다양성

린츠의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모든 학자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매튜 슈가트(Matthew Shugart)와 존 캐리(John Carey)는 대통령제를 단일한 제도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대통령제도 그 안에서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의 권한 범위, 의회와의 관계, 선거 방식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권한의 스펙트럼

모든 대통령이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미국 대통령은 법안 거부권은 있지만 의회 해산권은 없다. 반면 러시아 대통령은 의회 해산권까지 갖고 있어 훨씬 강력하다. 한국 대통령은 법안 제출권이 없지만, 프랑스 대통령은 이 권한을 갖고 있다.

슈가트와 캐리는 이런 차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대통령 권한 지수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같은 대통령제라도 권한의 강도에 따라 민주주의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선거 제도와의 상호작용

대통령제의 성패는 선거 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는지, 대통령 선거가 결선투표제인지 단순다수제인지에 따라 정당 체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브라질처럼 비례대표제와 대통령제를 결합하면 다당제가 형성되어 대통령이 의회 다수를 확보하기 어렵다. 반면 미국처럼 소선거구제와 대통령제를 결합하면 양당제가 강화되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부 운영이 가능하다.

내각제의 장단점

그렇다면 내각제는 완벽한 대안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내각제도 나름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불안정성의 위험

내각제의 가장 큰 약점은 정부의 불안정성이다. 이탈리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70번 가까이 정부가 바뀌었다. 벨기에는 2010-2011년 사이 541일 동안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이런 불안정성은 정책의 일관성을 해치고 국가 운영을 어렵게 만든다.

특히 다당제 상황에서 연립정부가 구성되면 작은 정당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 종교 정당들이 갖는 영향력이 대표적인 예다.

책임성의 모호함

내각제에서는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할 수 있다. 연립정부에서 정책이 실패했을 때 어느 정당의 책임인지 명확하지 않다. 유권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대통령제에서는 적어도 행정부의 수반이 누구인지 명확하다. 정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도 대통령에게 집중된다. 이는 민주적 책임성 측면에서 장점이 될 수 있다.

혼합형 정부 형태의 등장

현실 세계의 정부 형태는 순수한 대통령제나 내각제보다 훨씬 복잡하다. 많은 국가들이 두 제도의 장점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이원집정부제(Semi-presidentialism)

프랑스가 대표적인 예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과 의회가 선출한 총리가 행정권을 나눠 갖는다. 대통령은 외교·국방을, 총리는 내정을 담당하는 식이다.

이 제도의 장점은 유연성이다. 대통령과 의회 다수파가 같은 정당일 때는 대통령제처럼 작동하고, 다를 때는 내각제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동거정부' 상황에서는 권력의 이중성으로 인한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의회 권한이 강화된 대통령제

한국이나 미국도 순수한 대통령제와는 거리가 있다. 의회의 입법권과 예산권이 강력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제약하는 다양한 장치가 존재한다. 특히 한국은 단임제를 통해 대통령의 권력 집중을 방지하고 있다.

제도 선택의 맥락성

어떤 권력구조가 최선인지는 그 나라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르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식민지 경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강력한 행정부에 대한 견제 장치로 설계되었다. 반면 영국의 내각제는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한국의 경우 권위주의 시대의 경험 때문에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발전해왔다. 5년 단임제, 국회의 강력한 예산권,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권 등이 그 예다.

21세기의 도전과 권력구조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전통적인 권력구조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한다. SNS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의 강화, 빅데이터를 활용한 정책 결정, AI 기반의 행정 자동화 등은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 틀을 흔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구조의 설계는 더욱 복잡한 과제가 된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숙의 민주주의의 균형, 전문성과 대표성의 조화, 효율성과 견제의 양립 등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 대통령제의 특수성과 개혁 논의

한국의 대통령제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5년 단임제는 레임덕을 조기에 초래하지만, 동시에 장기 집권을 방지한다. 대통령의 법안 제출권 부재는 입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지만, 때로는 정책 추진의 효율성을 저해한다.

최근에는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4년 중임제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내각제 등 다양한 대안이 제시된다. 하지만 어떤 제도를 선택하든 그것이 한국의 정치문화와 어떻게 상호작용할지가 관건이다.

제도를 넘어선 정치문화의 중요성

결국 어떤 권력구조를 채택하든 그것만으로는 민주주의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미국과 라틴아메리카가 비슷한 대통령제를 채택했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인 것처럼, 제도의 성패는 그것이 작동하는 정치문화적 맥락에 달려 있다.

타협과 관용의 문화, 법치주의에 대한 존중, 민주적 규범의 내면화 등이 없다면 어떤 제도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따라서 제도 개혁과 함께 정치문화의 성숙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비교정치학적 함의

권력구조에 대한 비교 연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첫째, 완벽한 제도는 없다. 모든 제도는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중요한 것은 각국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조합을 찾는 것이다.

둘째, 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제도도 진화해야 한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이 바람직하다.

셋째, 제도 간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권력구조는 선거제도, 정당체계, 사법제도 등과 맞물려 작동한다. 따라서 종합적인 관점에서 제도 설계를 고민해야 한다.

권력구조에 대한 논의는 단순한 학술적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는지, 어떤 거버넌스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된다. 21세기의 복잡한 도전 앞에서, 우리는 더 나은 권력구조를 모색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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