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이론의 위기와 전환점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교육과정 이론은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타일러(Tyler)의 합리적 모형과 타바(Taba)의 귀납적 모형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교육과정 이론들이 실제 교육 현장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조셉 슈와브(Joseph Schwab)는 1969년 발표한 논문 "The Practical: A Language for Curriculum"을 통해 교육과정 이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슈와브는 당시 교육과정 이론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현실과 괴리된 채 발전해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교육과정 이론의 만료(moribund)"라고 선언하며, 교육과정 연구가 이론적 탐구에서 실천적 접근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교육과정 이론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만료 이론(Moribund Theory)"의 의미와 핵심 논지
슈와브가 주장한 "만료 이론"의 개념은 당시 교육과정 연구의 현실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는 교육과정 이론이 '만료(moribund)'되었다고 선언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이론의 과잉: 교육과정 연구가 지나치게 이론 중심적이며, 교육 현장의 실제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 이론의 고갈: 기존 이론들이 서로 반복적이고 진부해져, 교육과정 실제에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지 못한다.
- 현장과의 괴리: 이론가들이 교실 현장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무시한 채 보편적 원리를 찾는 데 집착하고 있다.
- 단일 이론의 한계: 하나의 이론적 관점으로 교육과정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슈와브는 이러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교육과정 연구가 '이론적(theoretical)'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찾았다. 그는 교육과정 연구가 '실천적(practical)'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학적 관점에서 실천적 관점으로의 전환
슈와브는 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기존의 접근을 '공학적 관점(technical approach)'으로 규정했다. 이 관점에서 교육과정 개발은 명확한 목표 설정, 효율적인 수단 선택,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최적의 교육 경로를 설계하는 기술적 과정으로 간주된다. 타일러의 합리적 모형이 대표적인 공학적 접근법이다.
반면, 슈와브가 제안한 '실천적 관점(practical approach)'은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바라본다:
- 맥락 의존적: 교육과정은 특정 학교, 교실, 학생 집단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가치 지향적: 교육과정 결정은 기술적 효율성뿐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포함한다.
- 숙의적: 교육과정 개발은 관련 당사자들의 대화와 협의를 통한 숙의 과정이다.
- 적응적: 교육과정은 고정된 계획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조정되는 유연한 실천이다.
이러한 전환은 교육과정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공학적 관점이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중점을 둔다면, 실천적 관점은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가르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을 중시한다.
교육과정 의사결정의 네 가지 공통 요소
슈와브는 교육과정 의사결정에 네 가지 공통 요소가 관여한다고 보았다. 이를 '고리 구조(commonplaces)'라고 부르며, 교육과정 개발의 핵심 요소로 제시했다:
- 교과(subject matter): 가르쳐야 할 학문이나 지식의 내용과 구조
- 학습자(learner): 학생의 특성, 요구, 발달 단계, 관심사
- 교사(teacher): 교사의 전문성, 신념, 역량, 경험
- 환경(milieu): 학교와 교실의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맥락
슈와브에 따르면, 좋은 교육과정 결정은 이 네 가지 요소를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 어느 한 요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육과정이 왜곡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과 내용만 강조하면 학생의 특성과 요구가 무시될 수 있고, 학습자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학문적 엄밀성이 약화될 수 있다.
이 네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을 통한 숙의 과정이 바로 슈와브가 말하는 '실천적 접근'의 핵심이다. 이는 교육과정 개발이 단순한 기술적 과정이 아니라 복잡한 윤리적, 정치적, 실천적 판단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The Practical" 방법론의 특징과 의의
슈와브는 "The Practical"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교육과정 개발의 새로운 접근을 제시했다. 이 방법론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숙의(deliberation): 교육과정 개발은 관련 당사자들의 대화와 토론을 통한 숙의 과정이다. 숙의는 단순한 의견 교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가치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 문제 중심 접근: 추상적인 원리나 이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인 교육과정 문제에서 시작한다.
- 절충주의(eclecticism): 다양한 이론과 관점을 상황에 맞게 선택적으로 활용한다. 어떤 단일 이론도 모든 교육과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예술적 판단: 교육과정 개발은 과학적 원리의 적용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예술적' 판단의 과정이다.
- 사례 중심 접근: 보편적 원리보다는 구체적 사례의 축적과 분석을 통해 지식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방법론은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보다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를 강조한다. 슈와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phronesis, 실천적 지혜)' 개념을 교육과정 개발에 적용한 것이다.
교육과정 연구의 탐구적 전환
슈와브의 공헌 중 하나는 교육과정 연구의 '탐구적 전환(inquiry turn)'을 촉진한 것이다. 그는 교육과정 연구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론의 적용에서 탐구로: 기존 이론을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교육과정 연구를 재개념화한다.
- 다양한 탐구 모드: 교육과정 연구는 다양한 탐구 방식(이론적, 실천적, 예술적)을 활용해야 한다. 슈와브는 특히 '실천적 탐구(practical inquiry)'와 '생태적 탐구(eclectic inquiry)'를 강조했다.
- 교사의 탐구자 역할: 교사는 단순한 교육과정 실행자가 아니라, 교실 현장의 탐구자이자 연구자로서 역할해야 한다.
- 사례 연구의 중요성: 교육과정 지식은 추상적 이론보다 구체적 사례의 축적을 통해 발전한다.
이러한 탐구적 전환은 후에 '실행연구(action research)', '교사 연구자(teacher as researcher)' 운동, '내러티브 탐구(narrative inquiry)' 등 교육 연구의 다양한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슈와브의 교육과정 이론이 교육 현장에 미친 영향
슈와브의 실천적 접근은 교육 현장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 학교 기반 교육과정 개발: 중앙집중식 교육과정 개발에서 학교와 교사 중심의 교육과정 개발로 관심이 옮겨갔다.
- 교사의 역할 재정의: 교사를 단순한 교육과정 '전달자'가 아니라 '개발자'이자 '연구자'로 보는 관점이 강화되었다.
- 숙의적 접근의 확산: 교육과정 개발에 있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숙의 과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커졌다.
- 사례 연구의 증가: 교육과정 연구에서 사례 연구와 질적 연구 방법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 맥락 중심 교육과정 평가: 표준화된 평가를 넘어 맥락을 고려한 다양한 교육과정 평가 방법이 발전했다.
슈와브의 이론은 1980년대 이후 '학교 중심 교육과정 개발(school-based curriculum development)', '교사 임파워먼트(teacher empowerment)', '전문적 학습 공동체(professional learning community)' 등의 개념과 실천으로 이어졌다.
실천적‧탐구적 전환의 현대적 의의
슈와브가 제시한 실천적‧탐구적 전환은 오늘날의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 복잡성과 불확실성: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불확실성 속에서 공학적 접근의 한계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슈와브의 실천적 접근은 이러한 복잡성을 다루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 민주적 교육과정 개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숙의를 강조하는 슈와브의 접근은 교육과정 개발의 민주화와 연결된다.
- 교사의 전문성: 교사를 교육과정 의사결정의 핵심 주체로 보는 슈와브의 관점은 교사 전문성 신장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
- 맥락 중심 교육: 표준화된 교육과정의 한계를 인식하고, 지역과 학교의 맥락을 고려한 교육과정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이론과 실천의 통합: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을 넘어, 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강조하는 슈와브의 관점은 교육 연구와 실천 간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데 기여한다.
슈와브의 실천적 접근은 후에 등장한 재개념주의 교육과정 이론과도 연결된다. 재개념주의자들은 슈와브와 마찬가지로 기존 교육과정 이론의 한계를 비판했지만,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 교육과정의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
슈와브 이론의 비판과 한계
슈와브의 실천적 접근이 교육과정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한계와 비판이 존재한다:
- 방법론적 모호성: '실천적 접근'과 '숙의'의 구체적인 방법과 절차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 권력 관계 간과: 교육과정 의사결정에 내재된 권력 관계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
- 변화의 어려움: 기존의 공학적 패러다임이 강하게 자리 잡은 교육 체제에서 실천적 접근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
- 이론적 기여의 제한: 슈와브는 기존 이론을 비판하면서도, 새로운 이론적 관점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보수적 경향: 슈와브의 접근이 기존 교육체제의 근본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선에 중점을 둔다는 비판이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슈와브의 실천적‧탐구적 전환은 교육과정 이론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접근은 후에 등장한 다양한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적 접근의 기반이 되었다.
결론
조셉 슈와브의 실천적‧탐구적 전환은 교육과정 이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 그는 지나치게 이론 중심적이고 현장과 괴리된 교육과정 연구를 비판하며, 실천적 지혜와 맥락적 판단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접근을 제시했다.
슈와브가 제안한 '고리 구조'와 '숙의' 개념은 교육과정 개발을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그의 실천적 접근은 교육과정을 단순한 문서나 계획이 아니라, 교사, 학생, 교과, 환경의 역동적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실천적 과정으로 이해하게 했다.
오늘날의 교육 환경에서도 슈와브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표준화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교육 정책의 흐름 속에서, 교육의 맥락적 특수성과 교사의 실천적 지혜를 강조하는 슈와브의 관점은 교육과정 개발과 실행에 중요한 균형점을 제공한다. 교육과정을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관점과 실천적 접근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가운데, 슈와브의 실천적‧탐구적 전환은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을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로서 그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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