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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론 5. 재개념주의 운동의 출현과 전개 - 전통적 교육과정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

SSSCHS 2025. 5. 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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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분야에서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재개념주의 운동은 기존의 전통적 교육과정 이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이론적 논쟁을 넘어 교육과정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교육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을 촉구했다. 교육과정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이 혁명적 흐름의 배경과 핵심 주장, 그리고 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재개념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

1970년대 초반, 교육과정 분야는 큰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시민권 운동, 여성 해방 운동 등 사회적 격변기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기존의 교육 체제와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통적인 교육과정 이론, 특히 Tyler로 대표되는 합리적 모형은 당시 교육과정 개발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이 지나치게 기술적이고 관료주의적이며, 사회적 맥락과 권력 관계를 간과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재개념주의자들은 교육과정이 단순히 '어떻게'라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그리고 '왜'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로체스터 대학에서 열린 컨퍼런스는 재개념주의 운동의 공식적인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이 자리에서 William Pinar, Madeleine Grumet, Michael Apple 등의 학자들이 모여 기존 교육과정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했다. 이들은 교육과정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바라보았다.

'쿠루쿨룸(Curriculum)'에서 '쿠레레(Currere)'로

재개념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개념적 전환 중 하나는 '교육과정(curriculum)'에 대한 인식 변화였다. William Pinar는 라틴어 어원을 재해석하여, 명사형인 '쿠루쿨룸(curriculum)'에서 동사형인 '쿠레레(currere)'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쿠루쿨룸'이 '달려야 할 코스'라는 의미로 미리 계획된 교육 내용과 경험을 가리킨다면, '쿠레레'는 '달리는 행위' 자체를 강조한다. 이는 교육과정을 고정된 문서나 계획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교육적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해가는 동적인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러한 관점 전환은 교육과정의 중심을 외부적으로 주어진 목표나 내용에서 학습자의 주관적 경험과 의미 구성으로 옮겨놓았다. 교육과정은 더 이상 학생들이 따라가야 할 미리 정해진 길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가는 여정으로 재해석되었다.

전통적 교육과정 모형에 대한 비판

재개념주의자들은 Tyler로 대표되는 전통적 교육과정 모형에 대해 다각도로 비판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요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1. 기술주의적 접근의 한계

전통적 모형은 교육과정 개발을 일종의 '공학적' 과정으로 바라본다. 목표 설정, 내용 선정, 조직, 평가라는 선형적이고 기계적인 절차는 교육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재개념주의자들은 교육이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가치와 윤리, 정치와 문화가 얽힌 복잡한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2. 권력과 이데올로기 문제 간과

전통적 모형은 교육과정을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처럼 다루지만, 실제로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이해관계와 가치를 반영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교육과정의 선택과 배제 과정에는 항상 권력 관계가 작용하며, 이를 통해 특정 지식과 문화가 정당화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3. 맥락의 무시

Tyler의 모형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절차를 제시하지만, 각 학교와 지역사회의 특수한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재개념주의자들은 교육과정이 추상적 공간이 아닌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개인의 주체성 간과

전통적 모형에서 학생은 미리 계획된 교육과정의 수동적 수용자로 위치지어진다. 반면 재개념주의자들은 학생을 자신의 교육 경험을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학생의 생생한 경험과 주관적 의미가 교육과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만료된 이론(The Field is Moribund)"

Schwab의 유명한 선언처럼, 재개념주의자들은 기존의 교육과정 이론이 더 이상 교육 현실의 복잡성을 설명하지 못하며, 실질적인 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교육과정 분야가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개념주의의 다양한 흐름

재개념주의 운동 내에는 다양한 이론적 관점과 접근법이 존재했다. 크게 세 가지 주요 흐름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1. 자서적(Autobiographical)·현상학적 접근

William Pinar와 Madeleine Grumet을 중심으로 한 이 접근법은 개인의 교육 경험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를 강조한다. 이들은 '쿠레레(Currere)' 방법론을 통해 교육과정을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의미 구성의 과정으로 재해석했다. 학생과 교사 모두가 자신의 교육적 경험을 회고적, 전망적, 분석적, 종합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Pinar의 '쿠레레' 방법론은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 회고적(Regressive) 단계: 과거의 교육 경험을 자유롭게 회상한다.
  • 전망적(Progressive) 단계: 가능한 미래의 교육적 자아를 상상한다.
  • 분석적(Analytical) 단계: 과거와 미래 사이의 거리를 검토한다.
  • 종합적(Synthetical) 단계: 이러한 성찰을 통합하여 현재의 교육적 의미를 재구성한다.

이 접근법은 교육과정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교육 경험을 통해 구성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즉, 교육과정의 중심이 제도적 차원에서 개인적 차원으로 이동한 것이다.

2. 사회·문화적 비판 접근

Michael Apple, Henry Giroux 등이 주도한 이 접근법은 마르크스주의, 비판이론, 문화연구 등의 관점에서 교육과정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분석했다. 이들은 교육과정이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Apple은 '숨은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이라는 개념을 통해,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학교생활을 통해 암묵적으로 전달되는 가치와 규범, 태도 등이 기존의 사회 질서와 권력 관계를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육과정이 중립적이지 않으며, 특정 계급, 인종, 성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 접근법은 교육과정 개발이 단순한 기술적 과정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교육과정 개혁은 단순히 효율성 증진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평등 실현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해방적·비판적 교육학 접근

Paulo Freire, Ira Shor 등으로 대표되는 이 접근법은 교육과정을 사회 변혁과 해방의 도구로 바라보았다. 특히 Freire의 '의식화(conscientization)' 개념은 교육을 통해 학습자가 자신의 사회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Freire는 전통적인 '은행저금식 교육(banking education)'을 비판하고, 대화와 문제제기를 통한 '문제제기식 교육(problem-posing education)'을 제안했다. 은행저금식 교육에서 학생은 지식의 수동적 저장소로 취급되지만, 문제제기식 교육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세계를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주체가 된다.

이 접근법은 교육과정이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습자가 자신의 삶의 조건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해방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학습자의 실제 삶의 맥락과 경험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재개념주의 운동의 영향과 의의

재개념주의 운동은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 주요 영향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교육과정 담론의 확장

재개념주의 운동은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를 '어떻게'라는 기술적 차원에서 '무엇을', '왜'라는 본질적 차원으로 확장했다.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효과적인 절차보다는, 교육과정의 근본적인 목적과 가치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2. 교육과정의 정치성과 윤리성 조명

교육과정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는 교육과정 개발과 실행에 있어 권력 관계, 사회 정의, 윤리적 책임 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

3. 교육 연구 방법론의 다양화

재개념주의 운동은 교육과정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적, 양적 방법론 외에도 현상학, 해석학, 비판이론,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이론적 관점과 질적 연구 방법을 도입했다. 이는 교육 현상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4. 교사와 학생의 주체성 강조

재개념주의 운동은 교사와 학생을 단순한 교육과정의 전달자와 수용자가 아니라, 교육과정을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주체로 바라보았다. 이는 교사의 전문성과 학생의 주체적 학습 경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5. 교육과정 개발의 민주화

재개념주의 운동은 교육과정 개발이 소수의 전문가에 의해 하향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재개념주의에 대한 비판과 한계

재개념주의 운동이 교육과정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여러 비판과 한계점도 지적되었다:

1. 실천적 대안의 부족

재개념주의는 기존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에는 탁월했지만, 구체적인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교육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교육과정 모형이나 개발 방법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 이론의 난해성과 괴리

일부 재개념주의 이론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난해하여 일선 교사들이 이해하고 적용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았다. 교육 현장의 현실적 제약과 어려움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이상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3. 이데올로기적 편향성

일부 비판자들은 재개념주의가, 특히 사회·문화적 비판 접근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며 특정 정치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다. 교육과정을 정치화함으로써 오히려 교육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4.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의 함정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해체주의적 경향은 모든 지식과 가치를 상대화함으로써, 교육과정의 내용 선정과 조직에 있어 방향성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즉,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 도출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교육과정에서의 재개념주의 유산

1970-80년대에 시작된 재개념주의 운동의 영향은 오늘날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에서도 여전히 발견된다. 현대적 맥락에서 재개념주의의 주요 유산은 다음과 같다:

1. 교육과정의 다양한 차원에 대한 인식

오늘날 교육과정은 단순히 교과 내용이나 계획된 학습 경험만이 아니라, 공식적·비공식적·잠재적 차원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현상으로 이해된다. 또한 교육과정의 개발과 실행에 있어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맥락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2. 교육과정 개발의 참여적 접근

현대 교육과정 개발에서는 하향식 접근법 대신,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협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는 재개념주의가 강조한 교육과정 개발의 민주화와 맥을 같이 한다.

3. 비판적 페다고지와 사회정의 교육

재개념주의의 비판적·해방적 교육학 전통은 오늘날 비판적 페다고지, 다문화 교육, 사회정의 교육 등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들은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본다.

4. 교사의 전문성과 주체성 강조

현대 교육과정 담론에서는 교사를 단순한 교육과정 전달자가 아니라, 교육과정을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전문가이자 실천적 연구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재개념주의가 강조한 교사의 주체성과 맥을 같이 한다.

5. 학습자 중심 교육과정

학습자의 경험, 관심사, 필요에 기반한 교육과정 설계는 현대 교육과정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이는 재개념주의, 특히 자서적·현상학적 접근이 강조한 학습자의 주관적 경험과 의미 구성의 중요성과 연결된다.

결론

1970년대 시작된 재개념주의 운동은 교육과정 분야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운동은 교육과정을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닌, 철학적, 정치적, 윤리적, 미학적 차원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현상으로 재해석했다. 전통적 교육과정 모형의 한계를 비판하고, 교육과정의 정치성, A-주체성, 맥락성 등을 강조함으로써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의 지평을 크게 확장했다.

물론 재개념주의 운동에도 한계와 비판점이 존재하지만, 그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육과정이 누구의 지식과 가치를 반영하는가, 교육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가, 교사와 학생은 교육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은 현대 교육과정 논의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결국 재개념주의 운동의 가장 큰 유산은 교육과정을 단순히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인간과 사회를 지향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교육과정을 기술적 과제를 넘어, 끊임없는 대화와 성찰, 비판과 재구성의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재개념주의 50년의 역사는, 교육과정이 단순한 문서나 계획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대화의 장이며,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탐구의 여정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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