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ucation

교육과정론 9. 포스트모던·포스트구조주의와 교육과정 다원화

SSSCHS 2025. 5. 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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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교육과정에서 포스트모던으로의 전환

교육과정 이론은 20세기 후반 들어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했다.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에 뿌리를 둔 전통적 교육과정 관점이 포스트모던·포스트구조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적 조류를 만나면서 크게 변화한 것이다. 이전까지 교육과정 이론의 주류를 이루던 타일러(Tyler)와 타바(Taba)의 합리적·기술적 접근법, 그리고 재개념주의자들의 비판적 접근법 모두 모더니즘적 사고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다.

모더니즘적 교육과정은 보편적 진리와 객관적 지식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성과 과학을 통해 교육의 합리적 기획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타일러의 합리적 모형이 대표적인 예로, 교육목표의 명확한 설정과 체계적인 교육 경험의 계획이 가능하다는 신념에 기반했다. 심지어 비판적 관점의 재개념주의자들도 교육의 해방적 기능과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믿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적 '거대 서사(grand narrative)'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리오타르(Lyotard), 데리다(Derrida), 푸코(Foucault) 등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영향으로 교육과정 분야에도 근본적인 인식론적,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들은 보편적 진리와 객관적 지식이라는 모더니즘의 핵심 전제를 의문시하고, 지식의 사회적 구성과 맥락적 성격,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윌리엄 돌(William Doll)은 그의 저서 『A Post-Modern Perspective on Curriculum』(1993)에서 이러한 전환의 의미를 탐구했다. 돌은 모더니즘 교육과정이 닫힌 체계(closed system)로서 예측과 통제, 안정성과 질서를 추구한다면, 포스트모던 교육과정은 열린 체계(open system)로서 변화와 불확실성, 다양성과 창발성을 포용한다고 주장했다.

포스트모던 사고의 핵심 개념과 교육과정적 함의

포스트모던 사상은 다양한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포괄하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들을 살펴볼 수 있다.

거대 서사의 종말과 작은 이야기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에서 모더니즘의 특징인 '거대 서사'(grand narratives)의 종말을 선언했다. 거대 서사란 인류의 진보, 과학적 합리성, 보편적 해방 등 근대성을 정당화하는 포괄적 이야기 체계를 말한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거대 서사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며, 대신 다양한 '작은 이야기들'(small narratives)이 공존하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했다.

교육과정에서 이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지식 체계나 교육 이상을 추구하는 대신, 다양한 지식 형태와 교육적 실천, 가치관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그동안 주변화되었던 소수자, 하위문화, 비서구권의 목소리와 관점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다.

패트릭 슬래터리(Patrick Slattery)는 『Curriculum Development in the Postmodern Era』(2006)에서 이러한 관점을 교육과정에 적용하여,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개인적 내러티브를 포함하는 '자서전적 교육과정'(autobiographical curriculum)을 제안했다. 이는 학생들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지식을 중요한 학습 자원으로 활용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접근법이다.

해체와 차이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은 이원론적 사고와 위계적 대립 구조를 비판하고, 텍스트와 담론 속에 숨겨진 모순과 긴장, 배제된 의미들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이 이항 대립(binary opposition)에 기초하여 하나의 항을 다른 항보다 우위에 두는 위계적 사고 방식을 취해왔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이성/감정, 문화/자연, 남성/여성, 서구/비서구 등의 대립에서 항상 전자가 우위에 놓였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에서 해체적 접근은 지식과 교육 실천에 내재된 이러한 이항 대립과 위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배제되거나 주변화된 관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과학/예술, 객관적/주관적, 인지적/정서적 등의 대립에서 전통적으로 전자가 우위에 놓였던 교육과정 구조를 해체하고, 보다 균형 잡힌 접근을 모색한다.

데보라 브리츠만(Deborah Britzman)은 『Practice Makes Practice』(2003)에서 교사 교육에 해체적 접근을 적용하여, 교사의 정체성과 실천에 내재된 모순과 긴장, 다양한 목소리를 탐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교사들이 자신의 교육적 신념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교육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접근법이다.

담론과 권력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탐구하며, 특정한 '담론'(discourse)이 어떻게 권력 관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지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담론은 단순한 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특정한 주제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지식-권력 체계이다. 푸코는 교육, 의학, 형법 등 다양한 분야의 담론이 어떻게 주체를 규율하고 통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교육과정에서 푸코의 관점은 교육 담론과 실천에 내재된 권력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지식이 '정통'으로 간주되고 교육과정에 포함되는 반면, 다른 지식은 배제되는 과정에는 항상 권력 관계가 작용한다. 또한 평가, 분류, 선별 등의 교육 실천이 어떻게 학생들을 규율하고 통제하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토마스 포포켓비츠(Thomas Popkewitz)는 『A Political Sociology of Educational Reform』(1991)에서 교육과정 개혁과 교육 정책에 내재된 권력 관계와 통치성(governmentality)을 분석했다. 그는 교육 개혁이 종종 효율성, 책무성, 표준화 등의 언어로 정당화되지만, 이러한 담론 자체가 특정한 주체성을 구성하고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복수성과 차이

포스트모던 사상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복수성'(plurality)과 '차이'(difference)의 긍정이다.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는 『천 개의 고원』(1980)에서 중심화되고 위계적인 '수목적 사고'(arborescent thinking) 대신, 다중적이고 비위계적인 '리좀적 사고'(rhizomatic thinking)를 제안했다. 리좀(뿌리줄기)적 체계는 중심이나 위계가 없이 다양한 연결점들이 수평적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로, 지식과 의미의 생성 과정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교육과정에서 이러한 관점은 고정되고 위계적인 지식 체계 대신, 유동적이고 상호연결된 지식 네트워크를 지향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텍스트적 지식 구조와 맞닿아 있는 이 개념은,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통합적 접근과 다양한 관점의 연결을 강조한다.

데이비드 콜(David Cole)과 제스 몰(Jess Moriarty)은 『Literacy, Creativity and Meaning-Making』(2019)에서 리좀적 사고를 문해 교육에 적용하여, 학생들이 다양한 텍스트와 미디어를 넘나들며 의미를 구성하고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했다. 이는 기존의 선형적, 위계적 문해 교육을 넘어, 다중적이고 상호텍스트적인 문해 실천을 지향한다.

돌(Doll)의 포스트모던 교육과정 4R 기준

윌리엄 돌은 포스트모던 관점에서 교육과정을 재개념화하며, 전통적인 타일러식 목표 중심 모형 대신 새로운 교육과정 평가 기준으로 '4R'을 제안했다. 이는 풍부성(Richness), 재귀성(Recursion), 관계성(Relations), 엄격성(Rigor)을 가리킨다.

풍부성(Richness)

풍부성은 교육과정의 깊이와 다층성, 다의성을 가리킨다. 돌은 좋은 교육과정이 단순한 사실이나 정보의 전달을 넘어, 다양한 해석과 의미 탐색, 변형의 가능성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풍부한 교육과정은 학생들에게 깊은 사고와 토론, 탐구의 기회를 제공하며, 단일한 정답이 아닌 다양한 관점과 접근법을 포용한다.

예를 들어 문학 교육에서 텍스트의 단일한 '올바른' 해석을 가르치는 대신, 다양한 비평적 관점에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풍부성의 원리를 반영한다. 또한 역사 교육에서 단일한 역사적 내러티브 대신, 다양한 역사적 행위자들의 관점과 경험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접근도 이에 해당한다.

재귀성(Recursion)

재귀성은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 이해의 깊이와 복잡성이 증대되는 특성을 말한다. 돌은 교육과정이 선형적, 누적적 방식이 아닌, 동일한 주제나 문제로 계속 돌아오되 매번 더 깊은 수준의 이해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나선형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브루너(Bruner)의 나선형 교육과정 개념과 유사하지만, 돌의 재귀성은 단순히 내용의 심화가 아닌, 이해의 질적 변화와 재구성을 강조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이전 이해를 반성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이해를 구성해나간다.

예를 들어 생태계 개념을 학습할 때, 단순히 기초에서 고급으로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대신, 동일한 생태계 현상을 다양한 수준과 관점(개체, 종, 군집, 생태계, 지구 시스템 등)에서 반복적으로 탐구하며 이해를 심화시키는 접근이 재귀성을 반영한다.

관계성(Relations)

관계성은 교육과정 내의 다양한 요소들 간의 연결과 맥락, 그리고 교육과정과 더 넓은 문화적, 역사적, 생태적 맥락 간의 관계를 가리킨다. 돌은 지식이 고립된 사실들의 집합이 아니라, 복잡하게 상호연결된 관계의 네트워크임을 강조했다.

관계성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교육과정 내적 관계로, 다양한 주제, 개념, 학문 분야 간의 연결을 말한다. 둘째, 교육과정 외적 관계로, 학교 지식과 학생의 삶, 지역사회, 문화적 맥락 등과의 연결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를 학습할 때, 과학, 경제, 정치, 윤리, 문화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내적 관계성을 반영한다. 또한 기후변화 학습을 학생들의 일상생활, 지역사회의 환경 문제, 글로벌 정치경제적 맥락 등과 연결하는 것은 외적 관계성을 보여준다.

엄격성(Rigor)

엄격성은 교육과정의 철저함과 깊이, 비판적 사고의 수준을 가리킨다. 그러나 돌의 엄격성은 전통적 의미의 학문적 엄밀성이나 표준화된 기준 충족과는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가정과 전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다양한 관점의 탐색,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다루는 능력을 의미한다.

돌에게 엄격성은 '불확실성 속에서의 엄밀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모더니즘적 확실성과 명확성의 추구가 아닌,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깊이 있는 사고와 탐구를 지향하는 포스트모던적 접근이다.

예를 들어 과학 교육에서 단순히 과학적 사실과 이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잠정성과 사회적 구성 과정, 과학의 철학적 가정과 한계, 과학의 윤리적·사회적 함의 등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엄격성을 반영한다.

포스트구조주의와 교육과정의 정치학

포스트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지만, 특히 언어, 담론, 주체성의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추는 이론적 흐름이다. 포스트구조주의 교육과정 이론가들은 지식과 정체성이 어떻게 담론적으로 구성되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 어떤 권력 관계가 작용하는지를 분석한다.

교육과정 텍스트의 해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교육과정 텍스트(교과서, 교육과정 문서, 교육 정책 등)를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중립적 매체가 아닌, 특정한 관점과 가치, 권력 관계를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담론적 실천으로 본다. 이들은 교육과정 텍스트에 대한 해체적 읽기를 통해, 텍스트가 어떤 지식과 주체성을 특권화하고, 어떤 것들을 배제하는지를 분석한다.

Elizabeth Ellsworth는 『Teaching Positions』(1997)에서 교육적 소통과 관계에 내재된 권력 역학을 분석하며, '가르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그녀는 교사와 학생 간의 완전한 이해와 소통이라는 이상이 실현 불가능하며, 오히려 차이와 불완전함, 부분적 연결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교육적 관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주체성과 차이의 정치학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학생과 교사의 주체성이 고정되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담론과 실천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특히 인종, 젠더, 계급,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와 정체성이 교육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페미니스트 포스트구조주의자 크리스 위든(Chris Weedon)은 『Feminist Practice and Poststructuralist Theory』(1987)에서 젠더화된 주체성이 어떻게 교육 담론과 실천을 통해 구성되는지를 분석했다. 그녀는 지배적인 젠더 담론에 저항하고 대안적 주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교육적 가능성을 모색했다.

경계 넘기와 혼종성

포스트구조주의는 고정된 범주와 경계를 의문시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혼종적(hybrid) 실천과 정체성에 주목한다. 교육과정에서 이는 학문 분야 간 경계, 공식적/비공식적 지식의 경계, 학교/일상생활의 경계 등을 가로지르는 실천으로 나타난다.

헨리 지루(Henry Giroux)는 『Border Crossings』(1992)에서 교육을 '경계 교육학'(border pedagogy)으로 재개념화했다. 이는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이론적 경계를 넘나들며, 지배적 담론에 도전하고 대안적 지식과 주체성을 구성하는 교육적 실천을 말한다.

수행성과 저항

포스트구조주의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은 교육과정 이론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버틀러에 따르면, 정체성은 본질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교육과정에서 학생과 교사의 정체성이 어떻게 수행되고, 또 변화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디어드레 맥피(Deirdre McPhee)는 『Pedagogy of the Impossible』(2002)에서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교육에 적용하여, 교실에서의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녀는 지배적 교육 담론에 균열을 내고, 대안적 수행을 통해 새로운 교육적 주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했다.

포스트모던/구조주의 교육과정의 사례 분석

포스트모던/구조주의 관점은 실제 교육과정 설계와 실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다중 문해력과 비판적 미디어 교육

전통적인 문해 교육이 주로 인쇄 텍스트의 해독과 이해에 초점을 맞췄다면, 포스트모던 관점의 문해 교육은 다양한 기호 체계와 매체를 아우르는 '다중 문해력'(multiliteracies)을 강조한다. 뉴런던그룹(New London Group)이 제안한 이 개념은 문화적 다양성과 미디어 다양성을 함께 고려하는 포괄적 문해 교육을 지향한다.

콜롬비아의 '에스쿠엘라 누에바'(Escuela Nueva) 프로그램은 이러한 관점을 적용한 사례로, 학생들이 지역 문화와 지식, 다양한 미디어 자원을 활용하여 자신의 문해력을 발달시키는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특히 농촌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문해 실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비판적 미디어 교육도 포스트모던/구조주의 관점을 반영하는 중요한 교육과정 영역이다. 더글러스 켈너(Douglas Kellner)와 제프 셰어(Jeff Share)가 제안한 '비판적 미디어 문해력'은 학생들이 미디어 텍스트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권력 관계와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자신의 미디어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트랜스디스플리너리(Transdisciplinary) 교육과정

포스트모던 관점은 전통적인 학문 분야의 경계를 넘어, 복잡한 실제 문제를 중심으로 지식을 통합하는 트랜스디스플리너리 접근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접근을 넘어, 학문적 지식과 비학문적 지식, 학교 지식과 지역사회 지식의 경계까지 가로지르는 보다 급진적인 통합을 추구한다.

핀란드의 '현상 기반 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 교육과정은 이러한 접근의 대표적 사례로, 기후변화, 유럽연합, 인공지능 등 복잡한 실제 현상을 중심으로 다양한 학문 분야와 지식 형태를 통합적으로 탐구한다. 학생들은 전통적인 교과 구분 없이,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탐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호주의 퀸즐랜드 주에서 시행된 '새로운 기초'(New Basics) 교육과정도 유사한 접근을 취한다. 이 교육과정은 '풍부한 과제'(rich task)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학생들이 실제적 맥락에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통합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화적·해체적 교육학

포스트모던/구조주의 관점은 교수법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대화적 교육학'(dialogic pedagogy)과 '해체적 교육학'(deconstructive pedagogy)은 포스트모던 교육과정의 중요한 실천 방식이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대화적 교육'은 엄밀한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이라기보다 비판적 모더니즘에 가깝지만, 그의 접근법은 포스트모던 교육과정 실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프레이리는 교사와 학생 간의 수직적, 일방적 관계가 아닌, 상호적이고 대화적인, 지식의 공동 구성자로서의 관계를 강조했다.

로빈 알렉산더(Robin Alexander)의 '대화적 교수'(dialogic teaching) 접근법은 이러한 관점을 현대적으로 발전시킨 사례다. 이 접근법은 학생들 간, 그리고 교사와 학생 간의 진정한 대화와 의미 협상을 통해 지식이 구성된다는 관점을 취한다. 영국의 여러 학교에서 실행된 이 접근법은 학생들의 사고력, 언어 능력, 학습 참여도를 향상시키는 효과를 보였다.

한편, '해체적 교육학'은 데리다의 해체 개념을 교육적 실천에 적용한 것으로, 텍스트와 담론에 내재된 이항 대립과 위계, 배제된 의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교육 방식이다.

샤론 토드(Sharon Todd)는 『Learning from the Other』(2003)에서 윤리적 관계성에 기초한 해체적 교육학을 제안했다. 그녀는 '타자성'(otherness)과의 만남이 자아의 경계를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교육적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다문화 교육과 국제 이해 교육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성찰적 실천과 행위자성

포스트모던 교육과정은 교사와 학생의 성찰적 실천과 행위자성(agency)을 중요시한다. 교사와 학생은 주어진 교육과정의 수동적 전달자와 수용자가 아니라, 교육과정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적극적 행위자로 간주된다.

호주의 '성찰적 실천가를 위한 교육과정'(Curriculum for Reflective Practitioners) 프로젝트는 이러한 관점을 교사 교육에 적용한 사례다. 이 프로그램에서 예비교사들은 자신의 교육적 신념과 실천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다양한 교육 이론과 맥락을 고려하여 자신만의 교육과정 관점을 발전시키는 기회를 갖는다.

학생 측면에서는 '학생 주도 교육과정'(student-led curriculum)이 포스트모던 관점을 반영한다. 영국의 '학생 목소리'(Student Voice) 운동, 미국의 '학생 행위자성'(Student Agency) 접근법 등이 이러한 사례로, 학생들이 교육과정 설계와 평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학습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는다.

지식과 정체성의 다원화: 주요 쟁점과 도전

포스트모던/구조주의 교육과정 관점은 지식과 정체성의 다원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여러 도전과 쟁점에 직면해 있다.

상대주의와 지식의 지위

포스트모던 관점이 지식의 사회적 구성과 맥락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타당한가?'라는 상대주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과학 교육에서 이 문제는 첨예하게 대두된다. 진화론과 창조론, 기후 과학과 기후변화 부정론 등을 동등한 '관점'으로 취급해야 하는가?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Bringing Knowledge Back In』(2007)에서 이러한 상대주의적 함정을 경계하며, '강력한 지식'(powerful knowledge) 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모든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지식이 동등한 인식론적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학교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일상적 경험과 대중 문화를 넘어, 보다 강력한 설명력과 적용력을 가진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포스트모던 교육과정의 중요한 과제를 제시한다. 즉, 지식의 사회적 구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주장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를 피하고, 비판적 판단과 평가 능력을 발달시키는 교육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정체성 정치와 공통성의 문제

포스트모던 관점은 다양한 정체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사회적 분절과 고립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과연 다양한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공통의 시민적 정체성과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교육과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셰일라 슬로터(Sheila Slaughter)는 『Academic Capitalism』(1997)에서 고등교육이 시장 논리에 지배되면서, 지식과 교육이 개인적 소비재로 전락하고 공공선과 시민성 교육이 약화되는 현상을 비판했다. 그녀는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민주적 가치와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비판적 코스모폴리타니즘'(critical cosmopolitanism)을 제안했다.

디지털 시대의 지식과 교육과정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지식의 생산, 유통, 접근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소셜 미디어, 인공지능 등의 등장은 선형적, 위계적 지식 구조와 고정된 교육과정의 개념에 도전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교육과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조지 시멘스(George Siemens)의 '연결주의'(connectivism) 이론은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의 학습과 지식 관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지식이 더 이상 개인의 머릿속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속에 분산되어 있으며, 학습은 이러한 다양한 지식 노드들을 연결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고정된 내용 중심의 교육과정이 아닌, 네트워크 구성과 탐색, 비판적 평가와 창조적 재조합 능력을 기르는 교육과정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캐나다의 '디지털 리터러시 프레임워크'(Digital Literacy Framework)는 이러한 관점을 반영한 교육과정 사례로, 디지털 환경에서의 정보 탐색, 비판적 평가, 창조적 생산, 윤리적 참여 등 다양한 역량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포스트모던 이후: 교육과정 이론의 미래 전망

포스트모던/구조주의 관점은 교육과정 이론에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지만, 최근에는 '포스트모던 이후'(after postmodernism)의 관점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의 통찰을 수용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들이다.

비판적 실재론과 복잡성 이론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은 실재의 객관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항상 사회적, 역사적으로 매개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극단적 객관주의와 극단적 상대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제3의 길'로, 교육과정 이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마이클 영과 요한 무러(Johan Muller)는 『Truth and Truthfulness in the Sociology of Education』(2007)에서 비판적 실재론을 교육과정 이론에 적용하여, 지식의 사회적 구성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지식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상대주의를 거부하는 입장을 제시했다.

복잡성 이론(complexity theory)도 포스트모던 이후의 중요한 관점이다. 이는 교육과정을 선형적, 기계적 시스템이 아닌, 복잡적응계(complex adaptive system)로 바라보는 관점으로, 창발성(emergence),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비선형성(non-linearity) 등의 개념을 교육과정 이해에 적용한다.

데이비스와 수마라(Davis & Sumara)는 『Complexity and Education』(2006)에서 복잡성 이론을 교육에 적용하여, 교육과정을, 사전에 정해진 목표를 향해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계획이 아닌,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창발하는 역동적 현상으로 재개념화했다.

포스트휴머니즘과 신유물론

최근 등장한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과 '신유물론'(new materialism) 관점은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기술, 자연, 사물 등)의 상호연결성과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이는 교육과정을 인간 학습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더 넓은 생태적, 기술적 네트워크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서로 '얽혀'(entangled) 있다는 관점에서, 교육을 인간 주체의 개별적 성취가 아닌, 다양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창발하는 현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환경 교육, 기술 교육, 과학 교육 등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니며, 인간과 기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교육과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탈식민주의와 토착 지식 체계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 관점은 서구 중심적 지식과 교육과정에 도전하고, 다양한 문화적, 지식적 전통의 가치를 재평가한다. 특히 토착 지식 체계(indigenous knowledge systems)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교육과정에 통합하려는 시도가 증가하고 있다.

린다 투히와이 스미스(Linda Tuhiwai Smith)는 『Decolonizing Methodologies』(1999)에서 서구 학문적 방법론의 식민적 성격을 비판하고, 토착민들의 관점과 지식 체계에 기반한 연구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관점은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등 여러 국가의 교육과정 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마리 바투스테(Marie Battiste)는 『Decolonizing Education』(2013)에서 캐나다의 교육이 여전히 식민적 유산에 영향받고 있음을 지적하고, 원주민 지식과 서구 지식의 '윤리적 공존'(ethical coexistence)을 통해 보다 포용적이고 정의로운 교육과정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결론

포스트모던·포스트구조주의 관점은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보편적 진리와 객관적 지식, 중립적 교육이라는 모더니즘의 가정에 도전하고, 지식의 사회적 구성과 맥락적 성격,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돌의 '4R' 모형은 포스트모던 교육과정의 특성을 풍부성, 재귀성, 관계성, 엄격성이라는 네 가지 차원에서 포착하며, 전통적인 목표 중심 모형과는 다른 교육과정 개발과 평가의 틀을 제시했다. 이러한 관점은 다중 문해력, 트랜스디스플리너리 접근, 대화적·해체적 교육학, 성찰적 실천과 행위자성 등 다양한 교육과정 실천으로 구현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관점은 상대주의와 지식의 지위, 정체성 정치와 공통성, 디지털 시대의 지식과 교육과정 등 여러 쟁점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최근에는 비판적 실재론과 복잡성 이론, 포스트휴머니즘과 신유물론, 탈식민주의와 토착 지식 체계 등 '포스트모던 이후'의 관점들이 등장하면서, 교육과정 이론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다.

이러한 이론적 발전 속에서, 교육과정은 더 이상 고정된 내용과 목표의 집합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살아있는 대화적 공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학습자들이 다양한 맥락과 상황에 적응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교육과정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포스트모던 교육과정 관점은 교육자들에게 자신의 교육적 가정과 실천을 성찰하고, 다양한 학습자와 맥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속적으로 자신의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열린 태도를 요구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관점의 변화를 넘어, 교육의 본질과 목적,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 학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촉구하는 도전이자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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