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를 분류한다는 것의 의미
모든 선진국들이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그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나라는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혜택을 주고, 어떤 나라는 가난한 사람만 선별해서 돕는다. 어떤 나라는 국가가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고, 어떤 나라는 민간에 맡긴다. 이렇게 다양한 복지국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비교할 수 있을까?
복지국가 유형론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겉보기에는 복잡하고 다양해 보이는 복지제도들 속에서 공통된 패턴을 찾아내고, 몇 가지 이념형(ideal type)으로 분류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각국의 복지제도를 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정책의 효과를 비교하며, 미래의 발전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Titmuss의 선구적인 3분류
복지국가 유형론의 시초는 영국의 사회정책학자 리처드 티트머스(Richard Titmuss)다. 그는 1974년 저서 『사회정책(Social Policy)』에서 복지국가를 세 가지 모델로 구분했다. 이 분류는 복지를 바라보는 기본 철학과 정책의 목표에 따른 것이었다.
첫 번째는 잔여적 복지모델(Residual Welfare Model)이다. 이 모델에서 복지는 가족이나 시장이 실패했을 때만 최후의 수단으로 개입하는 '안전망'이다. 개인의 욕구는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시장을 통해 충족되어야 하고, 국가는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의 도움을 제공한다. 복지 수급은 일시적이어야 하고, 수급자는 자립 노력을 증명해야 한다. 미국이 이 모델의 대표적인 예다.
두 번째는 산업적 성취-수행 모델(Industrial Achievement-Performance Model)이다. 이 모델에서 복지는 경제적 기여에 대한 보상이다. 노동시장에서의 성과와 지위에 따라 복지 혜택이 차등적으로 제공된다. 사회보험이 중심이 되고, 기여한 만큼 급여를 받는 원칙이 적용된다. 직업별, 산업별로 다른 복지제도가 운영되며, 노동윤리와 생산성을 강조한다. 독일과 일본이 이 유형에 가깝다.
세 번째는 제도적 재분배 모델(Institutional Redistributive Model)이다. 이 모델에서 복지는 모든 시민의 권리다. 욕구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평등과 사회통합을 추구한다. 시장 원리보다는 필요의 원칙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며, 소득재분배 기능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이 모델을 따른다.
티트머스의 분류는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이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현실의 복지국가들이 하나의 모델에 딱 들어맞지 않고, 여러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는 한계도 있었다.
Esping-Andersen의 세 가지 복지 세계
진정한 돌파구는 1990년 덴마크 출신 사회학자 고스타 에스핑-안데르센(Gøsta Esping-Andersen)의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에서 나왔다. 이 책은 복지국가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평가받는다.
에스핑-안데르센은 복지국가를 단순히 지출 규모나 프로그램 종류로 분류하는 대신, 더 근본적인 세 가지 차원에 주목했다. 첫째는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둘째는 사회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 셋째는 국가-시장-가족의 복지 혼합(welfare mix)이다.
탈상품화는 개인이 노동시장에 의존하지 않고도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실업급여가 넉넉하고 기간이 길다면 탈상품화 수준이 높은 것이다. 사회계층화는 복지제도가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지 아니면 기존 계층 구조를 유지·강화하는지를 본다. 복지 혼합은 복지 제공에서 국가, 시장, 가족이 각각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본다.
이 세 가지 기준으로 18개 OECD 국가들을 분석한 결과, 에스핑-안데르센은 세 가지 복지 레짐(regime)을 도출했다.
자유주의 복지 레짐
자유주의 복지 레짐은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고 국가 개입을 최소화한다. 복지는 주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며, 엄격한 자산조사를 통해 수급자를 선별한다. 급여 수준은 낮고, 수급 조건은 까다롭다. 노동시장 참여를 강제하는 워크페어(workfare) 정책이 발달해 있다.
탈상품화 수준이 낮아서 개인은 생존을 위해 노동시장에 계속 참여해야 한다. 복지제도는 빈곤층과 중산층을 분리시키는 이중구조를 만든다. 빈곤층은 낙인이 찍힌 공공부조를 받고, 중산층은 민간보험에 의존한다. 결과적으로 계층 간 연대가 약하고 복지국가에 대한 정치적 지지도 취약하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대표적인 예다. 영국도 대처 정부 이후 이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들 국가에서는 개인의 책임과 자립을 강조하고, 복지 의존성을 경계한다. '일하는 복지(welfare to work)'가 핵심 슬로건이다.
보수적-조합주의 복지 레짐
보수적-조합주의 복지 레짐은 전통적인 사회 질서와 가족 가치를 중시한다. 복지는 주로 사회보험을 통해 제공되며, 직업과 소득에 따라 서로 다른 제도에 가입한다. 공무원, 화이트칼라, 블루칼라가 각각 다른 연금제도를 갖는 식이다.
탈상품화 수준은 중간 정도지만, 수급 자격이 고용 이력과 기여금에 연계되어 있다. 복지제도는 기존의 직업적, 계층적 차이를 그대로 반영하거나 오히려 강화한다. 가족(특히 남성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억제하는 정책이 많다.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가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 국가는 카톨릭 전통이 강하고, 코포라티즘(corporatism)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다. 국가는 직접적인 복지 제공자라기보다는 이익집단 간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
사회민주주의 복지 레짐
사회민주주의 복지 레짐은 보편주의와 평등을 추구한다.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권리로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한다. 소득조사 없이 보편적으로 지급되는 수당이 많고, 공공 서비스가 발달해 있다.
탈상품화 수준이 매우 높아서 개인이 노동시장 밖에서도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높은 고용률로 이어진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통해 완전고용을 추구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지원한다. 보편적 복지는 중산층도 수혜자로 만들어 강력한 정치적 연합을 형성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가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는 강력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오랜 집권을 경험했다. 높은 세금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소득재분배 효과가 크다. 성평등을 중시하여 육아휴직, 아동보육 등 가족정책이 발달해 있다.
유형론의 발전과 비판
에스핑-안데르센의 세 가지 세계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동시에 여러 비판과 수정 제안도 나왔다. 첫째, 남유럽 국가들(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이 어디에도 잘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들은 가족의 역할이 극도로 크고, 복지 발달이 늦으며, 클리엔텔리즘(clientelism)이 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남유럽 모델' 또는 '가족주의 모델'로 따로 분류하자고 제안했다.
둘째, 젠더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여성의 무급 돌봄 노동을 간과하고, 남성 중심의 노동시장만 분석했다고 지적했다. 탈상품화 개념도 애초에 상품화되지 않은 여성들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동아시아 국가들의 특수성이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 일본, 대만 등은 서구와 다른 발전 경로를 보였다.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의 유산, 유교적 가족주의, 기업복지의 중요성 등이 독특한 복지 레짐을 만들어냈다. 이를 '동아시아 모델' 또는 '생산주의 복지 레짐'으로 부르기도 한다.
넷째, 복지국가의 동태적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많은 국가들이 복지 개혁을 단행했다. 스웨덴도 1990년대 위기를 거치며 변화했고, 독일도 하르츠 개혁으로 큰 전환을 겪었다. 유형 간 경계가 흐려지고 수렴 현상도 나타났다.
유형론을 넘어서
최근에는 고전적 유형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들이 등장하고 있다. 복지국가를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하지 않고, 다차원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들이다. 예를 들어 피터 홀(Peter Hall)과 데이비드 소스키스(David Soskice)는 '자본주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이론으로 복지국가와 생산체제의 상호보완성을 분석했다.
또한 '사회투자국가(social investment state)'라는 새로운 패러다임도 주목받고 있다. 전통적인 소득보장 중심에서 벗어나 인적자본 투자, 여성 고용 촉진, 아동 투자 등을 강조하는 접근이다. 많은 국가들이 이런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화와 플랫폼 경제의 확산도 새로운 도전이다. 전통적인 고용관계가 해체되면서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제도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해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결론
복지국가 유형론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켜 이해하기 위한 도구다. 티트머스와 에스핑-안데르센의 고전적 분류는 여전히 유용한 분석틀을 제공한다. 하지만 현실의 복지국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하나의 이념형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각국이 자신의 역사적 유산과 현재의 도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자유주의, 조합주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효율성과 형평성,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연대, 경제성장과 사회통합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은 영원한 과제다.
21세기 복지국가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면서도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과거의 유형론을 넘어서 창조적인 정책 혼합(policy mix)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국 복지국가의 미래는 각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치적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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