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는 왜 어떤 나라에서는 발달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할까
스웨덴은 GDP의 30% 가까이를 복지에 쓰는 반면, 미국은 20%도 안 된다. 독일과 프랑스는 비슷한 경제 수준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의 구조가 판이하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단순히 부자 나라가 복지를 많이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미국처럼 부유하면서도 복지가 약한 나라도 있고,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스웨덴이 관대한 복지국가를 건설한 사례도 있다.
이런 퍼즐을 풀기 위해 다양한 이론들이 발전해왔다. 그중에서도 역사제도주의(Historical Institutionalism)와 권력자원론(Power Resources Theory)은 가장 영향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이 두 이론은 복지국가 발전을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와 역사의 산물로 본다.
역사제도주의 -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
역사제도주의의 핵심 개념은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다. 한번 특정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하면, 그 경로를 바꾸기는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초기의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큰 격차로 벌어지는 현상을 설명한다.
복지제도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말 독일이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을 도입할 때, 그것은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노동자들을 국가에 충성하게 만들고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보수적 의도였다. 하지만 한번 만들어진 사회보험 체제는 고유한 생명력을 갖게 됐다. 수혜자들이 생기고, 이들을 관리하는 관료조직이 만들어지고, 기득권이 형성됐다.
이후 독일의 모든 복지 확대는 이 초기 틀 위에서 이루어졌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나치 시대에도, 전후 서독에서도 사회보험 중심 체제는 유지됐다. 심지어 통일 후 동독 지역에도 같은 제도가 이식됐다. 이것이 바로 제도적 관성(institutional inertia)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대공황 시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됐지만, 남부 농업 지역 의원들의 반대로 농업 노동자와 가사 노동자는 제외됐다. 이들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이 초기의 배제는 이후 미국 복지제도의 인종적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한번 만들어진 제도의 틀은 바꾸기 어려웠고, 이는 오늘날까지 미국 복지국가의 약점으로 남아있다.
역사제도주의는 또한 '결정적 분기점(critical junctures)'에 주목한다. 전쟁, 경제위기, 정치체제 전환 같은 중대한 사건들이 제도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많은 나라에서 복지국가 확대의 계기가 됐다. 전시 동원 체제가 국가 능력을 키웠고, 전후 재건 과정에서 사회적 연대감이 높아졌다. 영국의 베버리지 보고서가 전쟁 중에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같은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니다. 각국의 기존 제도와 정치 구조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스웨덴은 전쟁을 계기로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건설했지만, 미국은 오히려 민간 기업복지 중심으로 갔다. 이런 차이는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됐다.
권력자원론 - 정치가 복지를 결정한다
권력자원론은 복지국가 발전을 계급 간 권력관계의 산물로 본다. 특히 노동계급의 정치적 동원과 좌파 정당의 집권이 복지 확대의 핵심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월터 코르피(Walter Korpi), 고스타 에스핑-안데르센 같은 학자들이 이 이론을 발전시켰다.
스웨덴은 권력자원론의 교과서적 사례다. 1930년대부터 사회민주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노동조합과 긴밀히 협력했다. 'Saltsjöbaden 협약'(1938)으로 노사정 대타협이 이루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완전고용과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스웨덴 모델'이 만들어졌다. 강력한 노동운동과 좌파 정당의 헤게모니가 관대한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반대로 미국은 노동운동이 약하고 좌파 정당이 부재한 대표적 사례다.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 인종 갈등으로 인한 노동계급 분열, 개인주의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선진국 중 가장 취약한 복지국가를 갖게 됐다.
하지만 권력자원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좌파가 약하고 노동조합도 분열되어 있지만 상당히 관대한 복지제도를 갖고 있다. 이는 국가 관료제의 역할, 카톨릭 사회교리의 영향 등 다른 요인들도 중요함을 보여준다.
권력자원론은 또한 자본가 계급의 역할도 중요하게 본다. 피터 스웨손(Peter Swenson)은 때로는 고용주들도 복지 확대를 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숙련 노동력을 확보하고,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사회화하며, 계급 갈등을 완화하려는 이유에서다. 스웨덴 대기업들이 복지국가 건설에 협조적이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도와 권력의 상호작용
역사제도주의와 권력자원론은 서로 보완적이다. 제도는 권력관계의 산물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제도는 다시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복지국가는 발전하거나 정체된다.
독일의 사례를 다시 보자. 비스마르크가 만든 직업별 사회보험 체제는 노동계급을 직종별로 분할했다. 각 직업집단은 자기 보험기금을 방어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계급 전체의 연대는 약화됐다. 이는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집권해도 스웨덴 같은 보편주의적 개혁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반면 스웨덴의 보편주의적 복지는 강력한 정치적 연합을 만들어냈다. 중산층도 복지의 수혜자가 되면서 복지 삭감에 저항하는 광범위한 연합이 형성됐다. 이것이 1990년대 경제위기에도 스웨덴 복지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제도는 또한 정책 선택지를 제약한다. 미국처럼 민간 의료보험이 발달한 나라에서 공공 의료보험을 도입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미 형성된 이익집단들이 강력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오바마케어가 그토록 논란이 됐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국제적 확산과 학습
복지제도는 국경을 넘어 확산되기도 한다. 정책 전이(policy transfer)나 정책 학습(policy learning)을 통해서다. 하지만 이 과정도 각국의 제도적 맥락과 권력관계에 따라 다르게 전개된다.
일본은 19세기 말 서구 제도를 배우면서 독일 모델을 선택했다. 메이지 정부는 프랑스나 영국보다 독일의 권위주의적 체제가 일본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도입된 사회보험 중심 체제는 이후 일본 복지국가의 기본 틀이 됐다.
한국은 더 흥미로운 사례다. 1960년대 개발독재 시절에는 '선성장 후분배' 논리로 복지를 억제했다. 하지만 1980년대 민주화 이후,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복지가 급속히 확대됐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서구 복지국가를 모델로 삼았지만, 한국만의 특수성도 반영됐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은 독일식 소득비례 체계를 따르지만, 건강보험은 영국식 단일보험자 체계를 채택했다.
복지국가의 정치적 딜레마
복지 확대는 항상 정치적 갈등을 수반한다. 누가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누가 혜택을 받을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정치의 핵심이다.
보편주의냐 선별주의냐의 논쟁도 결국 정치적 선택의 문제다. 보편주의는 중산층의 지지를 확보하기 쉽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 선별주의는 효율적이지만 수혜자를 낙인찍고 정치적 지지 기반을 약화시킨다. 각국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재정 여건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복지와 경제성장의 관계도 논쟁적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과도한 복지가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높은 복지 지출과 경제 성장을 동시에 달성했다. 이는 복지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이자 사회적 안정의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의 도전과 복지국가의 회복력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공세로 많은 나라에서 복지 개혁이 이루어졌다.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은 복지 축소를 주도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나라마다 달랐다.
영국은 대처 시대에 공공주택을 매각하고 실업급여를 삭감했다.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민영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NHS(국민건강서비스)는 살아남았다. 왜일까? NHS는 중산층도 이용하는 보편적 제도였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건드리기 어려웠다.
독일은 2000년대 초 하르츠 개혁으로 노동시장을 유연화했다. 실업급여 기간을 단축하고 저임금 일자리를 늘렸다. 하지만 사회보험 중심 체제는 유지됐다. 제도의 경로의존성이 급격한 변화를 막은 것이다.
스웨덴도 1990년대 경제위기로 복지 개혁을 단행했다. 연금제도를 개혁하고 일부 급여를 삭감했다. 하지만 보편주의 원칙은 포기하지 않았다. 강력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영향력이 여전히 컸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새로운 도전
오늘날 복지국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고령화, 저성장, 기술 변화, 세계화 등이 전통적인 복지 모델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각국의 대응은 여전히 과거의 제도와 권력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디지털 플랫폼 경제의 확산으로 전통적인 고용관계가 해체되고 있다. 사회보험 중심 체제를 가진 나라들이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일은 플랫폼 노동자에게도 사회보험을 적용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반면 덴마크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 모델로 상대적으로 잘 적응하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도 각국의 제도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전개된다. 핀란드는 실험적으로 부분 기본소득을 시도했다가 중단했다. 스위스는 국민투표에서 기본소득을 부결시켰다. 한국에서는 재난기본소득을 계기로 논의가 활발해졌다. 각국의 기존 복지제도와 정치 지형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론
복지국가의 발전은 단순히 경제 발전의 부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경로와 정치적 권력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다.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계산으로 시작된 독일의 사회보험, 노동운동의 힘으로 건설된 스웨덴의 보편적 복지, 인종 갈등으로 분열된 미국의 잔여적 복지는 모두 각국의 특수한 역사와 정치의 산물이다.
21세기의 도전은 이런 역사적 유산 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각국은 자신의 제도적 강점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과거가 미래를 완전히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복지국가의 미래는 여전히 정치의 영역이다. 누가 권력을 갖느냐, 어떤 연합이 형성되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열릴 것이다. 역사는 계속 쓰여지고 있고, 우리는 그 역사의 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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