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복지를 만든다는 생각
복지국가를 설명하는 가장 직관적인 이론이 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자연스럽게 복지도 발달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는 복지에 쓸 돈이 없지만, 부자 나라는 여유가 있으니 국민들을 더 잘 돌볼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로 GDP가 높은 나라들이 대체로 복지 지출도 많다.
이런 관점을 체계화한 것이 기능주의(Functionalism)와 근대화(Modernization) 이론이다. 해롤드 윌렌스키(Harold Wilensky), 필립스 커틀라이트(Phillips Cutright) 같은 학자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복지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기본 논리는 이렇다. 산업화는 전통적인 가족과 공동체를 해체시킨다. 농경사회에서는 대가족이 아프거나 늙은 구성원을 돌봤지만, 산업사회에서는 핵가족이 중심이 되고 이런 기능이 약화된다. 도시화로 인해 이웃 간의 상호부조도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능적 필요'가 생긴다는 것이다.
산업화가 만든 새로운 위험들
산업화는 또한 새로운 사회적 위험을 만들어낸다. 공장에서 일하다 다치는 산업재해, 경기 변동에 따른 대량 실업, 도시 빈민가의 열악한 주거환경 등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없었던 문제들이다. 이런 위험들에 대응하기 위해 산재보험, 실업보험, 공공주택 같은 복지제도가 필요해진다.
인구구조의 변화도 중요하다. 산업화는 출산율 감소와 기대수명 연장을 가져온다. 이른바 '인구전환(demographic transition)'이다. 노인인구가 늘어나면서 연금과 의료 서비스 수요가 증가한다. 동시에 생산가능인구는 감소해 부양부담이 커진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되기 어렵다.
교육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산업사회는 문해력과 기술을 갖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개별 가정이 이런 교육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공교육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다. 독일이 19세기에 세계 최초로 의무교육을 도입한 것도 산업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윌렌스키의 실증 연구
해롤드 윌렌스키는 1975년 저서 『복지국가와 평등(The Welfare State and Equality)』에서 이 이론을 실증적으로 검증했다. 64개국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GDP와 사회보장 지출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특히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복지 지출이 많았다.
윌렌스키는 이를 '수렴 가설(convergence hypothesis)'로 발전시켰다. 모든 나라가 산업화를 거치면서 비슷한 복지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상관없이 산업화의 기능적 요구는 동일하다고 봤다.
실제로 1960년대까지는 이 이론이 잘 맞는 듯했다. 서구 선진국들의 복지 지출이 꾸준히 증가했고, 제도도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도 나름의 복지제도를 발전시켰다. 일본 같은 후발 산업국도 서구 모델을 따라가는 듯했다.
이론의 한계와 반박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이 이론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경제 수준의 나라들 사이에서도 복지 지출과 제도에 큰 차이가 있었다. 미국과 스웨덴은 둘 다 부유한 나라지만, 복지 수준은 천양지차다. 한국과 대만은 빠른 산업화를 이뤘지만, 서구식 복지국가를 건설하지 않았다.
정치적 요인을 무시한 것도 문제였다. 기능주의는 복지 확대를 거의 자동적인 과정으로 봤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치열한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노동운동, 정당 정치, 이익집단의 압력 등이 복지정책을 좌우했다. 똑같은 '기능적 필요'가 있어도 정치적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왔다.
문화적 차이도 중요했다.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는 복지 확대에 저항적이었다. 반면 스칸디나비아의 평등주의 문화는 보편적 복지를 수용했다.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는 가족 책임을 강조해 공적 복지 발달을 억제했다. 산업화만으로는 이런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오일쇼크와 복지국가 위기
1973년 오일쇼크는 기능주의 이론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자 많은 나라들이 복지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은 복지 축소를 주도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복지도 축소된다는 것은 기능주의 논리와 맞지 않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나라마다 대응이 달랐다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은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지만, 독일과 프랑스는 기존 제도를 대체로 유지했다. 스웨덴은 오히려 1970년대에 복지를 더 확대했다. 경제위기라는 동일한 조건에서도 정치적 선택에 따라 다른 길을 갔던 것이다.
일본의 사례도 기능주의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빠른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80년대까지 복지 지출이 매우 낮았다. 대신 기업이 종신고용과 기업복지를 제공했다. 이는 일본 특유의 노사관계와 기업문화를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
세계화 시대의 복지국가
1990년대 이후 세계화는 기능주의 이론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다. 세계화는 모든 나라를 비슷한 압력에 노출시켰다. 자본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바닥을 향한 경쟁(race to the bottom)'이 우려됐다. 기업들이 세금과 규제가 적은 나라로 이동하면서 복지국가가 축소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달랐다. 일부 나라는 복지를 축소했지만, 다른 나라들은 오히려 확대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복지를 유지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복지를 확대했다. 세계화라는 동일한 압력에도 각국의 대응은 달랐다.
이는 제도의 경로의존성과 정치적 선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세계화는 제약 조건이지만, 그 안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 강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나라들은 세계화 압력에도 복지국가를 방어할 수 있었다.
기술 결정론의 함정
최근에는 기술 변화가 복지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일자리를 없애면서 기본소득이 불가피해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는 기술이 사회를 자동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일종의 기술 결정론이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은 다른 것을 보여준다. 19세기 산업혁명 때도 기계가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일부 직업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일자리도 생겼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였다. 독일은 직업훈련 제도를 강화했고, 스웨덴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펼쳤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기술 변화는 중요한 도전이지만, 그것이 복지국가의 미래를 자동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각국이 어떤 정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기술은 도구일 뿐,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사회가 결정한다.
인구 고령화의 도전
현재 가장 큰 도전은 인구 고령화다. 많은 선진국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서고 있다. 일본은 이미 30%에 가깝다. 한국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다. 이는 연금과 의료비 지출을 급증시켜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기능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복지 확대를 필요로 한다. 노인 인구가 늘어나니 더 많은 복지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세수는 줄어드는데, 복지 수요는 늘어나는 딜레마가 있다.
각국의 대응도 다르다. 스웨덴은 연금 개혁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높였다. 일본은 정년을 연장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늘리려 한다. 독일은 이민을 통해 생산가능인구를 보충한다. 같은 고령화 문제를 놓고도 각국의 제도와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른 해법을 찾고 있다.
기능적 필요와 정치적 선택
기능주의 이론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산업화와 근대화는 확실히 복지국가 발전의 중요한 배경이다. 새로운 사회적 위험, 인구구조 변화, 교육 수요 증가 등은 모든 산업국가가 직면하는 공통의 과제다.
하지만 이런 기능적 필요가 자동으로 복지 확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국의 역사적 경로, 정치적 역량, 문화적 가치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 미국과 스웨덴이 다른 복지국가를 갖게 된 것은 단순히 산업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결과다.
결론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복지국가 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능주의와 근대화 이론은 복지국가 등장의 구조적 배경을 잘 설명하지만, 각국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복지국가는 경제 발전의 자동적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 선택의 산물이다. 산업화가 만든 새로운 문제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각 사회가 결정해야 할 몫이다. 21세기의 새로운 도전들 - 세계화, 기술 변화, 인구 고령화 - 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기능적 압력과 정치적 선택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경제적 조건은 복지국가의 가능성과 한계를 설정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길을 갈지는 정치가 결정한다. 복지국가의 미래는 결국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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