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복지국가 모델과 다른 동아시아의 길
복지국가 연구는 오랫동안 서구 중심적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다. 에스핑-안데르센의 '세 가지 복지자본주의 세계'로 대표되는 전통적 복지국가 유형론은 자유주의, 보수주의(조합주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복지국가를 분류했지만, 이는 유럽과 북미 국가들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이들 국가의 독특한 복지 발전 경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아시아 복지국가 모델'이라는 새로운 논의가 등장했다.
동아시아 국가들(한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중국 등)은 서구 복지국가들과는 다른 역사적·문화적·경제적 배경 속에서 복지국가를 발전시켜 왔다. 서구가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와 계급 타협을 통해 복지국가를 발전시켰다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산성 향상과 인적자본 개발을 위한 도구로서 복지제도를 활용했다. 또한 유교적 가족주의 전통은 복지 책임의 상당 부분을 가족에게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생산주의 복지자본주의(Productivist Welfare Capitalism)
생산주의 복지자본주의는 Ian Holliday가 제시한 개념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복지체제가 경제성장과 생산성 향상에 종속되어 있다는 특성을 강조한다. 이 관점에서 복지정책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경제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생산주의 복지체제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정책에 종속된 사회정책이다. 복지제도는 경제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발전하며, 경제 목표가 사회 목표보다 우선시된다. 예컨대 동아시아 국가들은 보편적 소득보장보다 인적자본 개발과 고용 촉진에 초점을 맞춘 복지정책을 선호한다.
둘째, 선별적이고 제한적인 사회보장이다. 보편적 복지보다는 산업화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집단(공무원, 군인, 교사, 대기업 근로자 등)에 우선적으로 사회보험을 도입하고, 점진적으로 그 대상을 확대해 나가는 방식을 취했다.
셋째, 생산적 복지(productive welfare)를 강조한다. 단순한 소득 이전보다는 교육, 직업훈련, 보건의료 등 인적자본을 향상시키는 사회투자에 집중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생산적' 복지를 지향하는 것이다.
넷째, 낮은 수준의 복지 지출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GDP 대비 사회지출 비율은 OECD 평균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예를 들어, 2020년 기준 한국의 공공사회지출은 GDP의 12.2%로, OECD 평균인 20%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와 복지국가의 관계
개발국가는 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국가 모델을 의미한다.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은 대표적인 개발국가로 분류되며, 이들 국가는 강력한 관료제와 경제계획, 선별적 산업정책, 수출 지향적 전략을 통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개발국가 패러다임이 복지국가 발전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 주도의 복지제도 설계이다.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노동운동, 좌파 정당, 시민사회의 요구에 의해 아래로부터 발전한 것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국가 엘리트들이 위로부터 복지제도를 설계하고 도입했다.
둘째, 사회정책과 경제정책의 통합적 접근이다. 개발국가에서는 교육정책, 주택정책, 의료정책 등이 독립적인 사회정책이라기보다 경제발전 전략의 일부로 기능했다.
셋째, 기업 복지의 중요성이다. 개발국가는 대기업(한국의 재벌, 일본의 게이레츠 등)을 경제성장의 핵심 주체로 육성하면서, 이들 기업을 통한 복지 제공을 장려했다. 평생고용, 기업 연금, 사내 복지 등 기업 중심의 복지 시스템이 발달했다.
넷째, 복지의 정치적 도구화이다. 개발국가에서 복지정책은 종종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회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정권이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확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가족주의(Familialism)와 복지 책임의 분담
가족주의는 복지 제공의 주요 책임이 국가나 시장보다 가족에게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에서 비롯된 가족주의는 복지국가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 복지체제에서 나타나는 가족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족의 복지 책임이 제도화되었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법적으로 가족의 부양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수급 자격을 판단할 때 가족의 부양 능력을 고려하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적용해 왔다(최근 점진적으로 완화되고 있음).
둘째, 돌봄 노동의 가족화이다. 아동, 노인, 장애인 등의 돌봄은 주로 가족, 특히 여성에 의해 제공되었다. 공공 돌봄 서비스의 발달이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다.
셋째, 가족 기반 복지 전략이다. 개인보다는 가족 단위의 복지 향상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 발달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주택정책은 가족 형성과 유지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으며, 한국의 교육정책은 가족의 교육투자를 통한 세대 간 계층 상승을 지원하는 특성을 보였다.
중국, 대만, 한국의 복지국가 비교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 하의 복지체제
중국은 1949년 공산당 정권 수립 이후 국가-단위(work unit, 단웨이) 중심의 사회주의 복지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이 시스템에서는 도시 지역의 국영기업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포괄적인 복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1978년 개혁개방 정책 도입 이후 시장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이 시스템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조화사회' 건설을 목표로 새로운 복지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도시 근로자 기본 연금보험(1997년), 도시 근로자 기본 의료보험(1998년), 신형 농촌 합작 의료제도(2003년) 등이 도입되었다. 2012년 이후 시진핑 정부는 '정밀 빈곤 퇴치(Targeted Poverty Alleviation)' 정책을 통해 절대빈곤 해소에 초점을 맞추었다.
중국 복지체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도농 이원화 구조: 도시와 농촌 간 복지 격차가 큰 이원화된 복지체계
- 지역 간 불균형: 연해 발달 지역과 내륙 저발전 지역 간 복지 수준 격차
- 점진적 보편주의: 선별적 제도에서 시작하여 점차 보편적 제도로 확대
- 발전주의적 접근: 복지를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의 도구로 활용
대만: 민주화 이후의 복지국가 발전
대만은 1945년 국민당 정권 수립 이후 권위주의적 개발국가 모델을 추구하면서, 복지는 최소한의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초기에는 군인, 공무원, 교사 등 체제 지지 집단에 대한 선별적 복지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민주화 과정에서 복지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부상했고, 1990년대 이후 주요 복지제도가 도입되었다.
대만의 주요 복지제도로는 전민건강보험(1995년), 노인연금보험(2008년), 국민연금보험(2008년), 장기요양보험(2016년) 등이 있다. 특히 전민건강보험은 대만의 대표적 복지제도로서, 단일보험자 방식으로 운영되며 포괄적인 급여와 높은 만족도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제도이다.
대만 복지체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민주화 이후 복지 확대: 선거 경쟁에서 복지가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부상
- 사회보험 중심 구조: 건강보험, 연금보험 등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한 복지체계
- 가족의 중요성 유지: 공적 복지 확대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복지 책임이 여전히 강조됨
- 점진적 발전: 급진적 변화보다는 점진적이고 타협적인 복지 개혁
한국: 압축적 복지국가 발전
한국은 1960-80년대 권위주의 개발국가 시기에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면서 복지는 최소한의 수준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복지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고,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사회안전망 구축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복지제도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한국의 주요 복지제도로는 국민연금(1988년), 국민건강보험(1989년 통합), 고용보험(1995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2000년), 장기요양보험(2008년), 기초연금(2014년) 등이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복지제도를 급속히 확충했다.
한국 복지체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압축적 발전: 서구 복지국가가 100년 이상 걸쳐 발전한 과정을 30년 만에 압축적으로 경험
- 사회보험 중심 구조: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한 복지체계와 잔여적 공공부조
- 복지의 정치화: 2000년대 이후 복지가 주요 정치적 의제로 부상
- 이중구조: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기업복지와 취약계층 중심의 잔여적 공공복지 병존
동아시아 복지국가의 도전과 전환
인구구조 변화와 복지 수요 증가
동아시아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와 초저출산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2020년 기준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28.7%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한국(15.7%)과 대만(15.3%)도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합계출산율도 한국 0.84명, 대만 1.05명, 일본 1.34명, 중국 1.3명(2020년 기준) 등 초저출산 상태이다.
이러한 인구구조 변화는 연금, 의료, 장기요양 등 복지 수요 증가와 부양비 증가로 인한 재정 부담 증가를 가져온다. 동시에 가족 구조 변화로 인해 가족의 돌봄 기능이 약화되면서 공적 복지 확대 압력이 커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각국은 연금개혁, 장기요양제도 도입, 보육서비스 확대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시장 변화와 복지 사각지대
동아시아 국가들은 1990년대 이후 세계화, 탈산업화, 기술변화로 인해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불안정 고용이 심화되고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간 격차가 확대되고,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등 새로운 형태의 고용이 증가하면서 기존 사회보험 중심 복지체계의 사각지대가 확대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사회보험 적용 범위 확대, 기본소득 실험, 근로장려세제 도입 등 다양한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2021년부터 예술인, 플랫폼 노동자 등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을 확대했고, 일본은 2020년 노동기준법 개정을 통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강화했다.
복지국가 모델의 재정립
동아시아 국가들은 전통적 생산주의 복지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복지국가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서구 모델의 수용이 아닌, 동아시아의 역사적·문화적·경제적 맥락을 고려한 독자적 모델의 발전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 일본, 대만 등에서는 '사회투자국가', '포용적 성장', '지속가능한 발전'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복지정책을 재구성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소득보장 중심의 복지를 넘어, 인적자본 투자, 사회서비스 확대, 노동시장 통합 등을 통해 경제성장과 사회통합을 동시에 추구하는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한국형 뉴딜'(2020년)은 디지털 전환과 녹색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함께 사회안전망 강화를 핵심 축으로 설정했다. 일본의 '일억총활약 사회'(2015년) 전략은 저출산 대응, 개호(돌봄) 이직 제로, 노동개혁 등을 통해 포용적 성장을 지향한다.
결론
동아시아 복지국가 모델은 생산주의, 개발국가, 가족주의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의 교차점에서 형성되었다. 이는 서구 복지국가와는 다른 역사적·문화적·경제적 맥락을 반영하며, 경제발전 중심성, 국가 주도성, 가족 의존성을 특징으로 한다.
중국, 대만, 한국의 사례 비교는 동아시아 내에서도 각국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발전 경로에 따라 복지체제가 다양하게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는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인구 고령화, 노동시장 변화, 가족 구조 변화 등 유사한 도전에 직면하면서 복지체제의 재구성을 모색하고 있다.
동아시아 복지국가의 미래는 전통적 생산주의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복지체제를 구축하는 데 달려 있다. 경제성장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사회통합과 삶의 질 향상을 함께 추구하는 균형적 발전 모델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또한 동아시아 복지국가 연구는 서구 중심적 이론틀을 넘어 동아시아의 고유한 맥락과 경험을 반영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생산적 복지', '발전적 복지국가', '유교적 복지국가' 등의 개념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복지국가는 서구 모델의 단순한 모방이 아닌,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전통, 그리고 현재의 사회경제적 도전을 반영한 독자적 발전 경로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정에서 경제 발전과 사회 통합, 국가 책임과 가족 역할,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필요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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