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Welfare

사회복지정책론 6. 페미니스트 관점과 돌봄경제: 복지국가를 다시 보는 새로운 시선

SSSCHS 2025. 5. 1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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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복지국가 이론의 한계

복지국가 연구는 오랫동안 노동시장 참여와 소득보장 정책에 초점을 맞춰왔다. Esping-Andersen의 고전적 복지국가 유형론부터 권력자원론까지, 대부분의 이론들은 임금노동자의 탈상품화와 계층화를 중심으로 복지국가를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전체 사회구성원의 절반인 여성의 경험과 무급 돌봄노동의 가치를 체계적으로 간과했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1980년대부터 이런 남성중심적 복지국가 분석을 비판하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Ann Shola Orloff, Diane Sainsbury, Jane Lewis 같은 연구자들은 젠더 차원이 복지국가 분석에서 왜 핵심적인지를 보여줬다. 복지정책이 단순히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 성별 분업과 돌봄 책임의 분배를 규정하는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보이지 않는 돌봄노동의 가치화

페미니스트 복지국가 이론의 핵심 통찰은 '보이지 않는 노동'의 가시화다. 전통적인 GDP 계산 방식은 가정 내에서 이뤄지는 돌봄노동 - 아이돌봄, 노인돌봄, 가사노동 등 - 의 경제적 가치를 측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무급 돌봄노동 없이는 시장경제도, 복지국가도 작동할 수 없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보다 하루 평균 3시간 더 많은 무급 돌봄노동을 수행한다. 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전 세계 GDP의 13%에 해당하는 거대한 규모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돌봄경제(Care Economy)'가 시장경제만큼이나 중요한 경제 부문임을 강조한다.

복지국가와 젠더 레짐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복지국가가 단순히 계급 불평등만이 아니라 젠더 불평등을 재생산하거나 완화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Jane Lewis는 복지국가를 '남성부양자 모델(Male Breadwinner Model)'의 강도에 따라 분류했다. 강한 남성부양자 모델 국가들은 여성을 주로 어머니와 아내로 규정하고, 노동시장 참여보다는 가정 내 돌봄 역할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친다. 반면 약한 남성부양자 모델 국가들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하고 돌봄의 사회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분석틀은 Esping-Andersen의 3세계 모델과는 다른 국가 분류를 낳는다. 예를 들어, 독일과 영국은 Esping-Andersen의 분류에서는 각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체제로 구분되지만, 젠더 관점에서는 둘 다 강한 남성부양자 모델 국가로 분류된다. 반면 스웨덴과 덴마크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적극 지원하는 '이중소득자 모델(Dual Earner Model)'을 채택했다.

북유럽 vs. 남유럽: 가족정책의 대조적 경로

가족정책과 돌봄의 사회화 정도는 복지국가 간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북유럽 국가들은 1970년대부터 포괄적인 공공 보육서비스, 관대한 부모휴가 제도, 남성의 돌봄 참여 촉진 정책을 도입했다. 스웨덴의 경우, 480일의 부모휴가 중 90일은 반드시 아버지가 사용해야 하는 '아빠 쿼터제'를 시행하고 있다. 덴마크는 0-2세 아동의 65%가 공공보육시설을 이용할 정도로 보육의 사회화가 높다.

반면 남유럽 국가들은 전통적인 가족주의 모델을 유지해왔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공공보육 시설이 부족하고, 돌봄 책임을 주로 가족(특히 여성)에게 의존한다. 이러한 차이는 여성 고용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웨덴의 여성 고용률이 80%를 넘는 반면, 이탈리아는 50% 수준에 머물고 있다.

돌봄의 사회화와 경제적 효과

페미니스트 복지국가 이론은 돌봄의 사회화가 단순히 젠더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전체의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증가는 세수 기반을 확대하고, 노동력 부족 문제를 완화한다. 또한 질 높은 공공 보육서비스는 아동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미쳐 미래 인적자본의 질을 높인다.

OECD 연구에 따르면, 여성 고용률이 1% 증가할 때마다 GDP가 0.3% 증가하는 상관관계가 있다. 특히 고령화가 진행되는 선진국에서는 여성 노동력의 활용이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이 된다. 이는 돌봄의 사회화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사회적 투자'임을 보여준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드러낸 돌봄 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돌봄경제의 중요성과 취약성을 동시에 드러냈다. 학교와 보육시설이 폐쇄되면서 돌봄 책임이 다시 가정으로, 특히 여성에게 전가됐다.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간을 줄여야 했으며, 이는 'She-cession(여성 불황)'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팬데믹이 돌봄 인프라의 공공성과 회복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돌봄을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만 남겨둘 경우, 위기 상황에서 전체 경제 시스템이 마비될 수 있음이 증명됐다.

유급 돌봄노동의 저평가와 불안정성

페미니스트 관점은 또한 유급 돌봄노동의 문제에도 주목한다. 보육교사, 요양보호사, 가사도우미 등 돌봄 서비스 종사자들은 대부분 여성이며, 이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다른 직종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이는 돌봄노동이 '여성의 자연스러운 역할'이라는 젠더 고정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Nancy Fraser는 현대 자본주의가 '돌봄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는 증가했지만, 남성의 돌봄 참여는 그에 비례해 증가하지 않았고, 공공 돌봄 서비스도 충분히 확대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많은 가정들이 저임금 이주 여성 노동력에 의존하게 됐고, 이는 글로벌 차원의 돌봄 불평등을 낳았다.

보편적 돌봄 모델을 향해

최근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보편적 돌봄 모델(Universal Caregiver Model)'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모든 성인이 경제활동과 돌봄활동을 균형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네덜란드의 '1.5 소득자 모델'이나 독일의 '동등한 소득-동등한 돌봄 모델' 같은 실험들이 이러한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보편적 돌봄 모델은 단순히 여성을 남성처럼 만들거나, 남성을 여성처럼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일과 돌봄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이 생애주기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일과 돌봄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사회 구조를 만들려는 시도다.

결론

페미니스트 관점과 돌봄경제 이론은 복지국가 연구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단순히 여성 문제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의 작동 원리와 목표 자체를 재정의하는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돌봄은 더 이상 사적 영역의 부차적 활동이 아니라, 사회 재생산의 핵심이자 경제의 기반임이 분명해졌다.

21세기 복지국가가 직면한 도전들 - 인구 고령화, 노동시장 변화, 가족 구조의 다양화 - 은 모두 돌봄과 연결되어 있다. 페미니스트 복지국가 이론이 제시하는 통찰은 이러한 도전들에 대응하는 데 필수적이다. 미래의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는 젠더 평등과 돌봄의 가치를 중심에 두는 복지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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