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접근법의 스펙트럼
복지국가를 이해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패러다임으로 구분된다. 잔여적(residual) 모델은 복지를 시장 실패의 보완책으로 보고, 제도적(institutional) 모델은 복지를 시민의 기본권으로 인식한다. 발전국가형(developmental) 모델은 복지를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이론적 분류가 아니라, 각 국가의 역사적 경로와 정치경제적 맥락을 반영한다.
Richard Titmuss가 처음 제시한 잔여적-제도적 구분은 복지국가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여기에 James Midgley와 같은 학자들이 발전국가형 모델을 추가하면서, 특히 동아시아 복지체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틀이 마련됐다. 각 모델은 복지의 목적, 대상, 방법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을 담고 있다.
미국의 잔여적 복지 모델
미국은 잔여적 복지 모델의 전형적 사례다. 복지는 개인과 가족, 시장이 실패했을 때만 개입하는 '최후의 안전망'으로 간주된다. 자유주의 이념이 강한 미국에서는 개인의 자립과 책임이 강조되고, 정부 개입은 최소화돼야 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복지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자산조사(means-tested)를 거쳐 빈곤층에게만 제공된다. TANF(빈곤가정 한시부조), SNAP(식품보조), Medicaid(저소득층 의료보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엄격한 수급 자격 심사와 노동 요구 조건을 가지고 있다. '복지 의존'을 막기 위해 급여 기간도 제한적이다.
잔여적 모델의 특징은 복지 수급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다. 복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실패자, 의존적 인간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된다. 이는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와 '아메리칸 드림' 신화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으로 실패한 사람에 대한 도덕적 비난으로 이어진다.
스웨덴의 제도적 복지 모델
스웨덴은 제도적 복지 모델의 대표 국가다. 복지는 모든 시민의 권리이며, 정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포괄적인 사회보장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이는 단순히 빈곤층을 돕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안정적이고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스웨덴의 복지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보편적 성격을 띤다. 아동수당은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모든 가정에 지급되고, 의료와 교육은 무상으로 제공된다. 실업보험과 연금도 소득비례 원칙에 따라 중산층까지 포괄한다. 이러한 보편주의는 강한 사회적 연대감을 만들고, 복지국가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를 확보한다.
제도적 모델의 핵심은 예방적 접근이다. 문제가 발생한 후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개입한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평생교육, 예방적 건강관리 등이 이러한 철학을 반영한다. 복지는 소비가 아니라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로 인식된다.
한국의 발전국가형 복지 모델
한국은 발전국가형 복지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다. 1960-80년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복지는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교육과 의료에 대한 투자는 인적자본 형성을 위한 것이었고, 사회보험은 산업 노동력 확보를 위한 도구였다. '선성장 후분배'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한국의 초기 복지제도는 생산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공무원과 군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사회보험이 도입됐고,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배제됐다. 이는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집단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가족은 복지의 일차적 제공자로 간주됐고, 국가의 역할은 최소화됐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복지체제의 전환점이 됐다. 대량실업과 빈곤 증가로 사회안전망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를 표방하며 사회보험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공공부조를 강화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성장과 복지의 조화를 강조하는 발전주의적 사고가 지속됐다.
세 모델의 역사적 배경
각 모델의 차이는 역사적 경로의 산물이다. 미국의 잔여적 모델은 강한 자유주의 전통, 인종적 분열, 약한 노동운동에 기인한다. 뉴딜 시대에 일부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됐지만, 남부 주들의 반대로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은 좌절됐다. 냉전 시대 반공주의는 복지국가 확대를 '사회주의'로 낙인찍는 데 기여했다.
스웨덴의 제도적 모델은 강력한 노동운동,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 계급 타협의 전통에서 비롯됐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노사정 대타협(Saltsjöbaden 협약)은 복지국가 건설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 동질적인 인구 구성과 높은 사회적 신뢰도 보편적 복지국가 발전에 유리했다.
한국의 발전국가형 모델은 식민지 경험, 한국전쟁, 권위주의 정권하의 급속한 산업화와 관련이 있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이 최우선 과제였고, 복지는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됐다. 유교적 가족주의 전통도 국가 복지의 최소화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됐다.
세 모델의 성과와 한계
잔여적 모델의 장점은 재정 부담이 적고 노동 유인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높은 빈곤율, 극심한 불평등, 의료 접근성 문제 등이 한계로 지적된다. 미국은 선진국 중 가장 높은 상대빈곤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의료비 파산이 개인 파산의 주요 원인이다.
제도적 모델은 낮은 빈곤율, 높은 평등, 강한 사회적 응집력을 달성했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 중 하나다. 그러나 높은 조세 부담, 노동 유인 약화, 이민자 통합 문제 등이 도전 과제다. 1990년대 경제위기 이후 일부 복지 프로그램이 축소되기도 했다.
발전국가형 모델은 빠른 경제성장과 인적자본 개발에 성공했다. 한국은 한 세대 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성장 위주 정책은 심각한 불평등과 사회적 배제를 낳았다. 노인빈곤율이 OECD 최고 수준이고, 자살률도 매우 높다.
모델 간 수렴과 분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확산은 세 모델 간 부분적 수렴을 가져왔다. 스웨덴도 1990년대 이후 시장 원리를 일부 도입했고, 미국도 오바마케어를 통해 의료보장을 확대했다. 한국은 보편적 복지 요소들을 점진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경로 의존성은 여전히 강하다. 각국의 복지체제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 이해관계, 문화적 가치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미국에서 보편적 의료보험 도입이 계속 좌절되는 것, 스웨덴에서 높은 세금에 대한 지지가 유지되는 것, 한국에서 가족 중심 복지가 지속되는 것은 이러한 경로 의존성을 보여준다.
21세기의 도전과 모델 재구성
인구 고령화, 노동시장 변화, 기술 혁신은 세 모델 모두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한다. 미국은 증가하는 불평등과 의료비 문제에 직면해 있다. 스웨덴은 이민 증가와 복지재정 압박에 대응해야 한다. 한국은 초고령사회 진입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도전은 기존 모델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잔여적 모델도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확대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제도적 모델은 지속가능성을 위해 효율성 제고 방안을 모색한다. 발전국가형 모델은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재조정하고 있다.
결론
잔여적, 제도적, 발전국가형 복지 모델은 각기 다른 역사적 경로와 이념적 토대 위에서 형성됐다. 미국, 스웨덴, 한국은 이 세 모델의 전형적 사례를 보여주며, 각각의 성과와 한계를 드러낸다. 어떤 모델이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각국의 맥락에 맞는 복지체제 발전이 중요하다.
21세기의 복지국가는 전통적 모델의 경계를 넘어서는 하이브리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발전국가형 토대 위에 보편적 복지 요소를 접목시키는 독특한 경로를 개척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각 사회가 직면한 도전에 대응하면서도, 사회적 연대와 인간 존엄성이라는 복지국가의 핵심 가치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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