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Welfare

사회복지정책론 7. 시민권과 사회적 권리: 복지국가의 철학적 기초와 민주주의적 함의

SSSCHS 2025. 5. 1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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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의 시민권 이론: 권리의 역사적 진화

T.H. Marshall의 1950년 저작 "Citizenship and Social Class"는 복지국가 연구의 이론적 초석을 놓았다. Marshall은 시민권이 역사적으로 세 가지 차원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18세기에는 시민적 권리(civil rights) - 언론의 자유, 재산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이 확립됐다. 19세기에는 정치적 권리(political rights) - 투표권과 피선거권이 확대됐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야 사회적 권리(social rights) - 교육, 의료,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시민권의 일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Marshall의 핵심 통찰은 사회적 권리가 단순한 자선이나 시혜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라는 점이다. 중세의 구빈법이 빈민을 통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봤다면, 현대 복지국가는 모든 시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복지국가 발전의 철학적 토대가 됐다.

사회권의 등장과 계급 갈등의 완화

Marshall은 사회권의 확립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시장경제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낳지만, 사회권은 이러한 불평등의 극단적 효과를 완화한다.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교육, 의료, 소득을 보장받을 때, 계급적 지위가 삶의 질을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게 된다.

이 점에서 Marshall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이론과 구별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했다면, Marshall은 시민권의 확대를 통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고 봤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공존의 제도적 표현이다.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의 상호작용

사회권 개념은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추구한다면, 복지국가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평등을 추구한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평등을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부유한 시민과 빈곤한 시민이 형식적으로는 동등한 투표권을 갖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보편적 교육은 모든 시민에게 정치 참여에 필요한 지식과 역량을 제공한다. 사회보장은 경제적 불안정에서 오는 정치적 취약성을 줄인다. 공공의료는 건강한 시민사회 참여의 기반을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전제조건을 창출한다.

보편주의 vs. 선택주의: 영국과 캐나다의 경험

사회권의 구현 방식을 둘러싼 핵심 논쟁 중 하나가 보편주의와 선택주의의 대립이다. 보편주의는 소득이나 자산 수준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동일한 급여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원칙이다. 선택주의는 욕구가 큰 저소득층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원칙이다.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보편주의의 대표적 사례다. 1948년 창설된 NHS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시민에게 무료 의료를 제공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부자든 빈자든 동일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주의는 강한 사회적 연대감을 만들고, 중산층의 복지국가 지지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캐나다의 사회부조 프로그램들은 선택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소득 조사를 통해 수급자를 선별하고, 욕구 수준에 따라 차등적 급여를 제공한다. 선택주의의 장점은 제한된 자원을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선택주의가 수급자에 대한 낙인효과를 낳고, 중산층의 복지 프로그램 지지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시민권의 계층화와 복지국가 유형

모든 복지국가가 Marshall이 이상화한 보편적 사회권을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Esping-Andersen은 복지국가가 실제로는 시민권을 계층화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 복지국가는 시장에서의 성공 여부에 따라 시민을 구분하고, 빈곤층에게만 최소한의 급여를 제공한다. 보수주의 복지국가는 직업과 지위에 따라 차별화된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오직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만이 보편적이고 평등한 시민권에 가까운 모델을 구현한다.

이러한 차이는 각국의 정치적 역사와 깊이 연관돼 있다. 스웨덴 같은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강력한 노동운동과 보편주의적 정치 연합을 통해 포괄적 복지국가를 건설했다. 반면 미국은 인종적 분열과 약한 노동운동으로 인해 잔여적 복지 체제를 유지했다.

사회권의 확대와 후퇴: 역사적 순환

Marshall의 이론은 시민권이 점진적으로 확대되는 선형적 발전을 가정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는 이러한 낙관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영국의 대처 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복지국가를 축소하고 시장 원리를 강화했다. 사회권의 많은 요소들이 다시 상품화되고,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됐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권이 한번 확립되면 영구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정치적 힘의 균형, 경제적 조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에 따라 사회권은 확대될 수도, 축소될 수도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긴축정책은 많은 국가에서 사회권의 후퇴를 가져왔다.

세계화 시대의 시민권 재정의

세계화는 전통적인 국민국가 중심의 시민권 개념에 도전을 제기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과 노동의 이동은 누가 어떤 권리를 갖는가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EU는 회원국 시민들에게 초국가적 사회권을 부여하려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브렉시트와 난민 위기는 이러한 시도의 한계를 보여줬다.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사회권 문제는 특히 첨예한 논쟁거리다.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이 출생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기본적 사회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복지국가는 사회권을 시민권과 연결시키고, 비시민에게는 제한적 권리만을 인정한다.

디지털 시민권과 새로운 사회권

21세기 들어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시민권의 새로운 차원을 열고 있다. 인터넷 접근권, 디지털 리터러시, 데이터 프라이버시 같은 이슈들이 새로운 형태의 시민적 권리로 논의되고 있다. 핀란드는 2010년 인터넷 접속을 법적 권리로 인정한 첫 번째 국가가 됐다.

팬데믹은 디지털 격차가 교육, 의료, 고용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온라인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학생들, 원격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는 환자들,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노동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배제를 경험했다. 이는 디지털 접근성이 21세기 사회권의 필수 요소가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환경권과 미래 세대의 권리

기후변화와 환경 위기는 시민권 논의에 또 다른 차원을 더한다. 깨끗한 환경에서 살 권리, 지속가능한 미래를 물려받을 권리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권으로 제시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은 헌법에 환경권을 명시하고, 기후소송을 통해 정부의 기후정책 강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네덜란드의 우르헨다(Urgenda) 판결은 정부가 현재와 미래 세대의 생명과 복지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사회권이 현재 살아있는 시민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포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

Marshall의 시민권 이론은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복지국가 연구의 핵심 참조점이다. 사회권 개념은 복지가 자선이 아닌 권리임을 명확히 하고,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의 불가분한 관계를 조명한다. 보편주의와 선택주의, 시민권의 계층화, 세계화의 도전 같은 논쟁들은 모두 Marshall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21세기의 복지국가는 전통적 사회권을 넘어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디지털 시민권, 환경권, 이주민의 권리, 미래 세대의 권리 같은 이슈들은 시민권 개념의 확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존 사회권의 후퇴 위험도 상존한다. 복지국가의 미래는 이러한 긴장 속에서 사회권을 재정의하고 재구축하는 정치적 투쟁의 결과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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