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Welfare

사회복지정책론 12. 세계 각국의 연금제도 비교와 구조개혁 - PAYG vs 적립식 모델 및 인구고령화 대응전략

SSSCHS 2025. 5. 1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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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제도의 기본 구조와 이론적 배경

연금제도는 현대 복지국가의 핵심 기둥으로, 노후소득보장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보장제도다. 연금제도의 설계 방식에 따라 국가의 재정부담, 세대 간 형평성, 노인빈곤율 등이 크게 달라진다. 연금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원조달 방식과 급여체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재원조달 방식의 두 축은 부과방식(PAYG: Pay-As-You-Go)과 적립방식(Funded System)이다. 부과방식은 현재 경제활동인구가 납부한 보험료로 현재 노인세대의 연금을 지급하는 세대 간 부양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반면, 적립방식은 개인이 근로기간에 납부한 보험료를 적립하여 본인의 노후에 사용하는 자기부양 원리에 기초한다. 대부분의 공적연금은 이 두 방식의 혼합 형태로 설계된다.

급여체계 측면에서는 확정급여형(DB: Defined Benefit)과 확정기여형(DC: Defined Contribution)으로 구분된다. 확정급여형은 은퇴 후 받을 연금액이 미리 정해지는 방식으로, 소득대체율 개념으로 설명된다. 확정기여형은 납부하는 보험료가 정해지고 은퇴 후 연금액은 기금 운용 실적에 따라 달라지는 방식이다.

세계은행의 다층체계 연금모델

1994년 세계은행은 "Averting the Old Age Crisis"라는 보고서를 통해 연금제도의 다층체계(Multi-pillar System)를 제안했다. 이 모델은 국가, 기업, 개인이 노후소득보장의 책임을 분담하는 구조로, 단일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고 노후소득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1층(First Pillar)은 기초보장 층으로, 국가가 운영하는 공적연금이다. 보편적 기초연금이나 최저보장연금 형태로 빈곤방지 기능을 수행한다. 2층(Second Pillar)은 소득비례 층으로, 직장을 통한 퇴직연금이 여기에 해당한다. 소득수준에 비례한 적정 생활수준 유지가 목적이다. 3층(Third Pillar)은 개인 층으로, 개인연금이나 저축 등 자발적인 추가 노후준비 수단이다.

세계은행은 후에 이 모델을 확장하여 0층(빈곤층 대상 비기여 사회부조)과 4층(비공식 지원, 가족 간 이전)을 추가했다. 이 다층체계 모델은 노후소득보장의 위험을 분산하고,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 세계 연금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요국 연금제도 비교: 칠레, 스웨덴, 일본 사례

칠레: 민영화 중심의 적립식 DC 모델

칠레는 1981년 피노체트 군사정권 시절, 세계 최초로 공적연금을 전면 민영화한 국가다. 기존의 부과방식 DB형 공적연금을 폐지하고, 개인별 계정(Individual Account)에 기반한 적립식 DC형 연금으로 전환했다. 모든 노동자는 소득의 10%를 의무적으로 개인계정에 적립하고, 민간 연금관리회사(AFP: Administradoras de Fondos de Pensiones)가 이를 운용한다.

칠레 모델의 장점은 인구고령화에 따른 재정 부담을 줄이고, 자본시장 발전을 촉진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낮은 연금급여, 높은 관리비용, 비공식 부문 노동자의 낮은 가입률 등의 문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08년과 2023년 두 차례의 개혁을 통해 연대성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특히 최근 개혁으로 고용주 부담금이 도입되고, 최저보증연금이 확대되었다.

스웨덴: 명목확정기여(NDC) 모델과 자동조정장치

스웨덴은 1999년 기존의 DB형 공적연금을 NDC(Notional Defined Contribution, 명목확정기여) 방식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다. NDC는 부과방식의 재원조달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개인별 가상계정을 통해 기여와 급여의 연계성을 강화한 혁신적 모델이다.

스웨덴 연금제도는 소득비례연금(NDC), 프리미엄연금(적립식 DC), 최저보장연금(보편적 기초연금)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자동균형장치(Automatic Balancing Mechanism)를 도입하여 인구구조와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연금급여가 자동 조정되는 시스템을 갖췄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치적 개입 없이도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스웨덴 모델은 재정 지속가능성과 세대 간 형평성을 확보하면서도 적정 수준의 노후소득을 보장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성공적 개혁으로 스웨덴 모델은 이탈리아, 폴란드 등 여러 국가의 연금개혁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인구고령화 대응과 단계적 개혁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국가로,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 확보가 국가적 과제다. 일본의 연금제도는 국민연금(기초연금)과 후생연금(소득비례연금)의 이원화된 구조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1층 기초연금과 피고용자를 대상으로 한 2층 소득비례연금으로 구성된다.

1985년 대개혁을 시작으로 1994년, 2000년, 2004년 등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급여수준 조정, 지급개시연령 상향, 보험료율 인상 등 점진적 변화를 추진해왔다. 특히 2004년 개혁에서는 '마크로경제슬라이드'라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여 출산율과 평균수명 변화에 따라 급여수준이 자동 조정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일본의 연금개혁은 급진적 구조개혁보다는 기존 제도의 틀 내에서 점진적 파라미터 조정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접근법을 택했다. 그러나 여전히 낮은 출산율, 세대 간 불균형, 연금재정 악화 등의 과제가 남아있어 추가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인구고령화에 대응하는 연금개혁 전략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인구고령화는 부과방식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OECD 국가들의 노인부양비(65세 이상 인구/생산가능인구)는 2020년 27%에서 2050년 53%로 급증할 전망이다. 이러한 인구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연금개혁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여와 급여의 연계성 강화다. NDC 시스템이나 점수제(Point System) 도입을 통해 평생 기여에 비례한 급여를 받도록 하여 재정 지속가능성과 공정성을 높인다. 독일, 프랑스 등이 점수제를 운영하고 있다.

둘째, 자동조정장치 도입이다. 인구·경제 지표에 연동하여 연금급여나 수급연령이 자동 조정되는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스웨덴의 자동균형장치, 일본의 마크로경제슬라이드, 독일의 지속가능성 계수 등이 대표적이다.

셋째, 연금수급연령 상향이다. 평균수명 증가에 맞춰 연금수급 개시연령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정책으로, 영국은 68세, 이탈리아는 67세, 독일은 67세로 상향 조정했다. 일부 국가는 평균수명과 연동하는 자동조정 방식을 도입했다.

넷째, 다층체계 강화다. 공적연금 외에 기업연금, 개인연금 등 사적연금을 활성화하여 노후소득원을 다변화한다. 뉴질랜드의 KiwiSaver, 영국의 NEST 등 자동가입제도(Auto-enrollment)를 통해 사적연금 가입률을 높이는 정책이 확산되고 있다.

다섯째, 최저보장 강화다. 연금개혁에 따른 급여축소로 노인빈곤이 심화될 위험에 대응하여 기초연금이나 최저보장연금을 강화한다. 캐나다의 GIS(Guaranteed Income Supplement), 호주의 Age Pension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연금제도의 현황과 과제

한국의 연금제도는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한 다층체계로 구성된다. 국민연금은 1988년 도입된 부과방식과 적립방식이 혼합된 DB형 공적연금이다. 이외에 기초연금(0층), 퇴직연금(2층), 개인연금(3층)이 보완적 역할을 한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고령화 속도를 보이는 국가로, 현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에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에 따르면 현행 제도 유지 시 적립금은 2055년 소진될 전망이다. 또한 국민연금의 짧은 역사로 인해 현 노인세대의 연금 사각지대가 넓고, 노인빈곤율이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에 이른다.

한국의 연금개혁 방향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논의된다. 하나는 국민연금 내실화를 통한 적정급여 보장이고, 다른 하나는 재정 지속가능성 확보다. 적정급여 보장을 위해서는 보험료율 인상과 국가 재정 투입 확대가 필요하며, 재정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급여수준 조정과 수급연령 상향이 요구된다.

최근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현행 9%인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13%까지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은 현행 40%를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적 합의 도출이 어려운 상황이며, 제도의 지속가능성과 노인빈곤 해소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연금제도 개혁의 정치경제학

연금개혁은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과정이다. 연금제도는 세대 간, 계층 간 자원 재분배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첨예한 갈등을 수반한다. 이러한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성공적인 연금개혁의 핵심 요소다.

연금개혁의 정치적 어려움은 비용은 즉각적이지만 편익은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적 비대칭성'에서 비롯된다. 현재 세대는 보험료 인상이나 급여 삭감이라는 비용을 즉시 체감하지만, 개혁의 혜택인 제도의 지속가능성은 미래 세대가 누리게 된다. 이로 인해 정치인들은 임기 내 유권자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근본적 개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성공적인 연금개혁 사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전략을 활용했다. 첫째,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한 광범위한 이해관계자 참여다. 스웨덴은 개혁 과정에서 정당, 노조, 사용자단체 등이 참여하는 '연금개혁위원회'를 통해 합의를 도출했다. 둘째, 점진적 이행이다. 급격한 변화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단계적 개혁으로 충격을 최소화했다. 셋째, 패키지 딜 접근법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부분적 양보와 혜택을 제공하는 종합 패키지를 구성했다. 넷째, 경제위기나 재정위기 같은 '결정적 국면'을 활용했다. 위기 상황에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저항이 약화되는 기회의 창이 열렸다.

결론

연금제도는 현대 복지국가의 핵심 제도로, 노인빈곤 방지와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인구고령화 추세는 전통적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한다. 이에 대응하여 각국은 재정 지속가능성과 적정 급여 보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 위한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칠레의 완전적립식 민영화 모델, 스웨덴의 NDC 모델과 자동조정장치, 일본의 점진적 파라미터 조정 등 각국의 연금개혁은 서로 다른 정치·경제·사회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국제 비교 사례는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제공한다.

성공적인 연금개혁은 단순히 재정계산에 기초한 기술적 접근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사회적 합의, 세대 간 연대와 공정성에 기초한 정치적 과정이 필수적이다. 또한 연금제도를 독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 정책, 가족정책, 건강보험 등 다른 사회정책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인구구조 변화, 노동시장 불안정성 증가, 가족구조 변화 등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한 현대 사회에서 연금제도의 개혁은 단순한 제도 수정을 넘어 사회계약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세대 간, 계층 간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자원 배분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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