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과 현대성 비판
현대 사회의 위험 양상을 분석하는 데 있어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의 '위험사회'(Risk Society) 이론은 핵심적인 분석틀을 제공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직후 발표된 그의 저서 『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는 현대 산업사회가 스스로 생산한 위험에 의해 위협받는 역설적 상황을 포착했다. 벡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부의 생산'에서 '위험의 생산'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반사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과정에 있다.
벡의 위험사회론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위험'(risk)과 '위해'(hazard)의 구분이다. 위해가 자연재해와 같이 인간의 통제 밖에서 발생하는 재난이라면, 위험은 인간의 결정과 행위에 따른 결과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현대 사회의 주요 위험들—기후변화, 핵 위험, 유전자 조작, 금융위기, 테러리즘 등—은 근대화 과정 자체가 생산한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제조된 불확실성'(manufactured uncertainty)의 성격을 띤다.
벡이 주목한 현대 위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위험의 '탈경계화'(de-localization)로,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둘째, 위험의 '불가산성'(incalculability)으로, 그 확률과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셋째, '비보상성'(non-compensability)으로, 위험이 실현될 경우 그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거나 보상하기 어렵다. 이런 특성을 가진 현대적 위험은 전통적인 보험과 배상의 논리로는 관리하기 어렵다.
특히 벡은 현대 위험의 '민주적' 속성을 강조한다. "가난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표현처럼, 현대적 위험은 계급적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물론 위험에 대한 취약성과 대응 능력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메랑 효과'로 인해 위험의 생산자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벡의 이론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포함한다. 그는 계몽주의적 합리성과 과학기술에 대한 무비판적 신뢰, 무제한적 경제성장 추구, 자연에 대한 통제와 착취 등 근대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벡은 '반사적 근대화'를 통해 근대성의 부정적 결과를 성찰하고 새로운 형태의 근대성—'제2의 근대' 또는 '성찰적 근대성'—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위험사회와 복지국가의 변화
위험사회론은 복지국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전통적 복지국가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사회의 '구사회적 위험'(old social risks)—실업, 질병, 노령, 산업재해 등—에 대응하기 위해 발전했다. 이러한 위험들은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하고, 통계적으로 산출할 수 있으며, 집단적 차원에서 관리 가능했기에 사회보험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탈산업사회로의 이행과 함께 복지국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테일러-구비(Taylor-Gooby)가 '신사회적 위험'(new social risks)으로 개념화한 저출산·고령화, 가족구조 변화, 노동시장 불안정화 등은 전통적 복지국가의 대응 능력을 넘어서는 복합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 나아가 벡이 주목한 '제조된 불확실성'으로서의 위험들—기후변화, 팬데믹, 금융위기, 테러리즘 등—은 국민국가 단위의 사회보장체계로는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전 지구적 도전이 되었다.
위험사회론의 관점에서 복지국가의 변화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위험의 성격 변화에 따른 사회보장 체계의 재구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소득보장 중심의 '보상적' 복지에서 '예방적' 사회투자로의 이동, 생애주기 전반에 걸친 위험 관리를 위한 통합적 접근 등이 그 예이다.
둘째, 위험 거버넌스의 다층화와 복합화가 진행되고 있다. 국가 중심의 일원적 위험 관리에서 초국가적(EU 등), 국가적, 지역적, 시민사회적 차원을 아우르는 다층적 거버넌스로 전환되는 추세이다. 특히 탈경계적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셋째, 위험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정치화가 심화되고 있다. 벡이 강조했듯이, 현대 위험은 객관적 실재일 뿐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위험이 사회적 의제가 되고 정책적 대응의 대상이 되는지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복지정치의 핵심 쟁점이 '재분배'에서 '위험 관리'로 이동하는 경향도 관찰된다.
넷째, 복지국가의 정당화 담론이 변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복지국가는 계급 간 연대와 사회적 평등이라는 가치에 기반해 정당화되었다면, 위험사회에서는 '공통의 위험에 대한 공동 대응'이라는 기능적 필요성이 더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복지국가의, 계급 기반 정치에서 '위험 기반 정치'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복지국가의 개입 방식이 다변화되고 있다. 직접적인 급여 제공이나 서비스 공급 외에도, 위험 평가와 모니터링, 정보 제공과 투명성 강화, 다양한 행위자들 간의 조정과 협력 촉진 등 거버넌스적 접근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벡이 제안한 '하위정치'(sub-politics)의 활성화와도 연결된다.
반사적 근대화와 복지국가의 재구성
벡이 제시한 '반사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개념은 복지국가의 재구성을 위한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 된다. 반사적 근대화는 단순히 근대화의 부정적 결과를 성찰하는 것을 넘어, 근대성의 기본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제도적 실천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복지국가 맥락에서 이는 기존 복지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위험 환경에 적합한 복지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반사적 근대화의 관점에서 복지국가 재구성의 핵심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국가 중심의 폐쇄적 복지체제에서 초국적 차원의 사회정책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벡이 제안한 '세계시민적 관점'(cosmopolitan perspective)은 국경을 넘어선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U의 사회정책 통합이나 국제노동기구(ILO)의 '모두를 위한 사회적 보호'(Social Protection for All) 이니셔티브 등이 이러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둘째, 경제성장 중심주의에서 지속가능성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다. 전통적 복지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한 분배 확대라는 모델에 기초했으나, 이는 환경적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생태적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복지를 통합하는 '녹색 복지국가'(green welfare state) 또는 '지속가능한 복지'(sustainable welfare) 모델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는 탄소세와 같은 환경세를 통한 복지재원 확보, 기본소득과 같은 대안적 소득보장, 돌봄·의료·주택 등 핵심 서비스의 탈상품화 등을 포함한다.
셋째, 전문가 중심의 위험 관리에서 시민참여적 거버넌스로의 이행이다. 벡은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맹신과 전문가 지배를 비판하면서, 시민사회의 참여와 '하위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복지정책 맥락에서 이는 정책 결정과정의 민주화, 서비스 공동생산(co-production), 당사자 중심 접근 등으로 구체화된다. 스웨덴의 연금개혁 과정에서의 사회적 대화,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설계에서의 시민참여 등이 사례가 될 수 있다.
넷째, 위험의 개인화에 대응한 새로운 연대 기반의 구축이다. 벡은 위험사회에서 전통적 계급 정체성이 약화되고 위험이 개인화되는 경향을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지국가는 단순한 소득재분배를 넘어, 다양한 위험에 직면한 개인들 간의 새로운 연대 기반을 창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사회투자 국가'(social investment state)는 이러한 접근의 한 형태로, 인적자본 투자와 사회서비스 확충을 통해 개인의 위험 대응 능력을 강화하면서도 집단적 책임을 유지하려는 시도이다.
마지막으로, 반사적 근대화는 복지국가의 규범적 기반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근대적 복지국가가 진보와 성장, 물질적 풍요라는 가치에 기초했다면, 성찰적 근대성에서는 지속가능성, 삶의 질, 위험 예방과 회복력(resilience)과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해진다. 복지국가의 성과를 GDP 성장률이 아닌 웰빙 지표, 지속가능성 지표 등 대안적 척도로 평가하려는 시도들이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다.
기후변화와 복지국가: 생태사회정책의 부상
위험사회론의 관점에서 볼 때, 기후변화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장 대표적인 '제조된 불확실성'이다. 산업화와 경제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이 초래한 기후변화는 벡이 지적한 현대 위험의 모든 특성—탈경계성, 불가산성, 비보상성—을 보여준다. 또한 기후변화는 복지국가가 다루어야 할 새로운 사회적 위험을 생성하고,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가 복지국가에 제기하는 도전은 다차원적이다. 첫째, 직접적인 복지수요의 증가이다. 기후재난(홍수, 가뭄, 폭염 등)은 건강 위험, 재산 손실, 생계 불안정 등을 초래하여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둘째, 복지재원에 대한 압박이다. 기후변화는 경제성장 둔화, 생산성 감소, 인프라 손상 등을 통해 복지국가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 셋째,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 문제이다. 탄소집약적 산업 종사자들의 일자리 상실, 에너지 비용 상승으로 인한 에너지 빈곤 등 전환 비용이 불평등하게 분배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여 '생태사회정책'(ecosocial policy) 또는 '녹색 복지국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부상하고 있다. 생태사회정책은 사회정책과 환경정책의 통합적 접근을 추구하며, 사회적 복지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단순한 정책 조합이 아니라, 복지국가의 근본적인 재구성을 요구한다.
생태사회정책의 구체적 전략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환경세(탄소세, 자원세 등)를 통한 복지재원 확보와 환경행동 유인이다. 환경세 수입을 취약계층 지원이나 기본소득 형태로 재분배함으로써 환경 목표와 사회적 형평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중 배당'(double dividend) 전략이 주목받고 있다. 스위스의 탄소세 환급제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탄소세 중립화 정책 등이 사례가 될 수 있다.
둘째, 보편적 기본서비스(Universal Basic Services) 확대를 통한 저탄소 생활양식 지원이다. 대중교통, 에너지, 주택, 돌봄, 정보 등 핵심 생활영역에서의 공공서비스 확충은 탄소 발자국을 줄이면서도 생활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한다. 특히 공유경제와 공동체 기반 서비스는 자원 효율성과 사회적 연대를 동시에 강화할 수 있다.
셋째,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탈성장 복지'(degrowth welfare) 모델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복지를 유지하는 방안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고용을 유지하고 여가시간을 확대하며 환경 부담을 줄이는 전략이 제시되고 있다. 독일의 노동시간 단축 제도(Kurzarbeit), 프랑스의 35시간 노동제 등이 부분적으로 이러한 방향을 보여준다.
넷째, 지역경제와 공동체 회복력 강화를 위한 사회연대경제 촉진이다.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커뮤니티 비즈니스 등 사회연대경제 조직들은 지역 차원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사회적 통합을 동시에 추구한다. 바스크 지역의 몬드라곤 협동조합,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의 사회적 협동조합 네트워크 등이 성공적 사례로 꼽힌다.
마지막으로, 사회서비스 자체의 친환경적 전환이다. 복지국가의 핵심 서비스 영역인 의료, 돌봄, 교육 등도 상당한 탄소 배출과 자원 소비를 수반한다. 이러한 서비스의 친환경적 재설계—즉 '그린 케어'(green care), '지속가능한 의료'(sustainable healthcare) 등—는 복지국가의 생태적 전환에 중요한 요소이다.
위험사회와 한국 복지국가의 과제
위험사회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산업사회의 위험과 후기 산업사회의 위험을 동시에 경험하는 복합적 위험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도 성장기에 형성된 산업재해, 빈곤, 노령 등 전통적 사회적 위험과 함께, 저출산·고령화, 가족구조 변화, 노동시장 불안정화 등 신사회적 위험이 중첩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기후변화, 팬데믹, 디지털 전환 등 전 지구적 위험 요인들이 가세하면서 복지국가의 대응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한국은 199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제도적 기반을 확충해왔으나, 여전히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위험사회론의 관점에서 한국 복지국가가 직면한 핵심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파편화된 사회보장 체계의 통합적 재구성이다.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개별 위험별로 분절적으로 발전해왔으며, 제도 간 조정과 연계가 부족하다. 생애주기 전반에 걸친 통합적 위험 관리 체계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둘째, 위험의 계층화와 양극화에 대한 대응이다. 한국 사회에서 위험은 '민주적'으로 분포되지 않으며,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 취약계층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위험의 불평등한 분포를 더욱 가시화했다. 보편적 기본소득, 전국민 고용보험 등 포괄적 안전망 구축이 시급한 과제이다.
셋째, 위험 거버넌스의 민주화와 시민참여 확대이다. 한국의 위험 관리 체계는 여전히 관료제 중심, 하향식 접근이 지배적이다. 위험에 대한 사회적 대화와 공론화,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시민참여, 서비스 공동생산 등을 통해 거버넌스의 민주성과 효과성을 높여야 한다.
넷째, 기후위기에 대응한 생태사회정책의 발전이다. 한국은 높은 탄소 의존도와 에너지 집약적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어,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상당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예상된다. '그린 뉴딜'과 같은 정책은 환경 목표와 사회적 목표를 통합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다섯째, 초국적 위험에 대응한 지역 및 글로벌 협력 강화이다. 팬데믹, 기후변화, 금융위기 등 한 국가의 역량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초국적 위험에 대해, 동아시아 지역 차원의 사회보장 협력과 글로벌 거버넌스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복지국가의 규범적 기반 재구성이다. 한국 복지국가는 경제성장과 경쟁력 강화라는 도구적 관점에서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 성장 시대에 맞는 복지국가의 새로운 비전과 가치—예컨대 웰빙, 회복력, 지속가능성, 포용 등—을 사회적으로 구축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디지털 전환과 기술적 위험의 관리
벡의 위험사회론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위험을 생산하는 역설적 상황에 주목했다. 21세기 들어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블록체인 등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은 벡이 말한 '제조된 불확실성'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다. 디지털 기술은 복지서비스의 혁신과 효율화를 가능케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 위험과 불평등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디지털 전환이 초래하는 주요 위험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노동시장 변화와 기술적 실업이다. 자동화와 인공지능으로 인한 일자리 대체, 플랫폼 경제의 확산에 따른 불안정 노동 증가 등은 전통적 사회보험 체계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도전이다. 둘째, 디지털 격차와 불평등 심화이다. 디지털 리터러시, 인프라 접근성 등에 따른 격차는 정보, 서비스,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데이터 감시와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이다. 복지서비스 제공 과정에서 수집되는 방대한 개인정보가 오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넷째, 알고리즘 편향과 차별이다. 인공지능 기반 의사결정이 기존의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하거나 강화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디지털 위험에 대응하여 복지국가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첫째, 디지털 전환 시대에 맞는 사회보장 체계의 재설계이다. 기본소득, 보편적 기본서비스, 평생학습 계좌제 등 전통적 고용 관계에 덜 의존하는 대안적 보장 메커니즘이 논의되고 있다. 특히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보험 접근성 확대가 중요하다.
둘째, 디지털 포용(digital inclusion)을 위한 적극적 개입이다. 공공 와이파이, 디지털 기기 지원,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등을 통해 모든 시민이 디지털 혜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핀란드의 '모두를 위한 AI' 프로그램,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시민권 등이 주목할 만한 시도이다.
셋째, 데이터 거버넌스와 디지털 권리 보호이다. 복지서비스 이용자의 데이터 주권을 강화하고,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EU의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이나 '설명 가능한 AI'(explainable AI) 이니셔티브는 이러한 방향의 선도적 시도이다. 특히 복지급여 자격 심사, 사례 관리, 위험 예측 등에 알고리즘이 활용될 때, 그 결정 과정과 근거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이의제기가 가능해야 한다.
넷째, 기술 발전의 방향성에 대한 민주적 논의와 사회적 통제이다. 벡이 강조했듯이, 기술 발전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선택의 문제이다. 어떤 기술이,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개발되고 확산되는지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 덴마크의 기술영향평가제도, 네덜란드의 구성적 기술영향평가(Constructive Technology Assessment) 등이 참고할 만한 모델이다.
다섯째, '디지털 복지국가'(digital welfare state)의 민주적 설계이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복지서비스 혁신—원스톱 통합서비스, 예측적 사례관리, 개인 맞춤형 지원 등—은 효율성과 효과성을 높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 중심성과 민주적 가치가 보존되어야 한다. UN 사회권위원회가 경고한 '디지털 파놉티콘'(digital panopticon)으로의 변질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위험사회론의 관점에서 볼 때, 디지털 전환은 복지국가에게 '반사적 근대화'의 기회이자 도전이다. 기술 결정론적 사고를 넘어,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사회적 목표와 가치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성찰과 제도적 혁신이 요구된다.
팬데믹과 복지국가의 회복력
2020년 초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은 위험사회론의 현실적 적실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벡이 지적한 현대 위험의 특성—탈경계성, 불가산성, 비보상성—이 팬데믹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났으며, 기존 사회보장 체계의 취약성과 회복력(resilience)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팬데믹은 복지국가에게 다차원적 도전을 제기했다. 첫째, 긴급한 건강 및 소득 위기에 대한 즉각적 대응이 요구되었다. 각국은 유례없는 규모의 긴급 지원 프로그램—임시 기본소득, 고용유지 지원, 자영업자 지원, 취약계층 특별 급여 등—을 신속하게 도입했다. 이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재정 확대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서의 이탈을 의미했다.
둘째, 기존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와 취약성이 노출되었다. 특히 불안정 노동자, 자영업자, 돌봄 노동자 등 비전형적 고용 관계에 있는 이들을 위한 보호 장치가 미흡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노동시장 참여에 기반한 전통적 사회보험 모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셋째, 위기 대응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원격의료, 온라인 교육, 비대면 복지서비스 등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디지털 복지국가'로의 전환이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디지털 격차와 불평등 문제도 함께 부각되었다.
팬데믹 경험은 '회복력 있는 복지국가'(resilient welfare state)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회복력이란 위기와 충격에 직면했을 때 핵심 기능을 유지하고, 신속하게 적응하며,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위험사회 맥락에서 복지국가의 회복력을 강화하기 위한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지시스템의 다층적 설계와 중복 보호(redundancy)이다. 단일 시스템에 과도하게 의존하기보다, 다양한 보호 메커니즘—공적 사회보험, 사회부조, 보편적 기본소득/서비스, 지역사회 상호부조 등—을 계층적으로 구축함으로써 어느 한 부분이 실패하더라도 전체 시스템이 기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유연성과 신속한 적응 능력이다.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관료적 경직성을 극복하고 신속하게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한 국가들(예: 독일의 긴급지원, 한국의 재난지원금 등)이 더 효과적으로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다. 복지제도 설계에 있어서도 '자동안정화 장치'와 같이 상황 변화에 자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셋째, 선제적 위험 관리와 예방적 접근이다. 위기가 발생한 후 대응하는 것보다, 잠재적 위험을 미리 식별하고 예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를 위해 데이터 기반 위험 모니터링, 시나리오 기획, 스트레스 테스트 등의 방법론이 복지 분야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넷째, 지역사회 역량과 사회적 자본 강화이다. 팬데믹은 국가의 공식적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지역 차원의 상호부조와 자발적 연대가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복지국가는 이러한 지역사회 복원력을 지원하고 강화하는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
다섯째, 글로벌 거버넌스와 국제 연대의 강화이다. 팬데믹과 같은 초국가적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WHO, ILO 등 국제기구의 역할 강화, 지역 블록 차원의 사회보장 협력, 글로벌 건강 안보 체계 구축 등이 필요하다.
팬데믹 경험은 벡의 위험사회론이 예견한 바와 같이, 현대 사회가 '조직화된 무책임'의 상태에서 '반사적 근대화'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위기 이전 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더 회복력 있고 포용적인 복지체제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의 방향성과 속도는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들 간의 정치적 상호작용을 통해 결정될 것이다.
결론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은 현대 복지국가가 직면한 도전과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렌즈를 제공한다. 벡이 분석한 '제조된 불확실성'으로서의 현대적 위험—기후변화, 팬데믹, 금융위기, 디지털 전환 등—은 전통적 복지국가의 대응 능력을 시험하고 있으며, 새로운 형태의 복지 패러다임과 제도적 혁신을 요구한다.
위험사회론의 관점에서 볼 때, 미래 복지국가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첫째, 국민국가 중심의 폐쇄적 복지에서 초국적 차원의 사회정책으로 확장해야 한다. 글로벌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 협력과 세계시민적 연대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둘째, 경제성장 중심주의에서 지속가능성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복지국가는 사회적 복지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통합하는 '생태사회정책'을 발전시켜야 하며, 포스트 성장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회보장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전문가 중심의 위험 관리에서 시민참여적 거버넌스로 이행해야 한다. 위험에 대한 인식, 평가, 관리 과정에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시민사회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위험 거버넌스의 민주성과 효과성을 높여야 한다.
넷째, 위험의 개인화 추세에 대응하여 새로운 연대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전통적 계급 기반 연대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공통의 위험에 대한 인식과 회복력 있는 공동체 구축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연대를 발전시켜야 한다.
다섯째, 복지국가의 규범적 기반을 재구성해야 한다. 성장, 효율성, 경쟁력 등 전통적 가치를 넘어, 웰빙, 회복력, 지속가능성, 참여와 포용 등 성찰적 근대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벡의 '반사적 근대화' 개념은 위기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위험 구조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통해, 더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제2의 근대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험사회의 도전은 복지국가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혁신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다. 벡이 강조했듯이, 위험사회에서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하위정치'(sub-politics)의 영역, 즉 전통적 정치제도 밖에서의 다양한 행위자들의 참여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복지국가의 미래 역시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들—시민사회, 사회운동, 전문가 집단, 지역공동체, 국제기구 등—의 역동적 상호작용과 정치적 선택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21세기 복지국가의 과제는 위험사회의 도전을 직시하면서도, 벡이 말한 '희망의 예술'(art of hope)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성찰적 근대성에 기반한 새로운 복지 패러다임을 통해, 불확실성과 위험 속에서도 사회적 안전과 정의, 지속가능한 번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험사회에서의 복지국가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방향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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